2015.01.28 13:19
복음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구원에 대해서 그리고 그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믿음에 대해서 반복해서 강조하시면서 설명하신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이면 다 같은 믿음이 아니라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올바른 믿음이 있고, 믿음처럼 보이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결코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8장 30절에는 분명히 기록하기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믿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것처럼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곧 바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어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그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31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 바로 앞 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는 말씀은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의 말씀에 깊이 감명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감이 누그러지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 드릴 정도의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직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깊이 인식하고 죄를 회개함으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곧바로 인정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주님께서 보실 때 참된 믿음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신 내용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그 뒤를 따르던 장면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 하셨나?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33절에는 그 유명한 제자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 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히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눅 14:25-33)
마태복음 8장에는 한 서기관이 등장한다. 그는 예수께 어디로 가시든지 자신은 예수를 좇겠노라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주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는 말씀으로 답변을 대신하신 것을 보게 된다.
주께서는 즉시 그를 제자로 받아 주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중요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말씀으로 그를 시험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말씀들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을 반갑게 모두 받아 주시고 허락을 해 주시기는 커녕 주님께서는 왜 이같은 말씀들을 하신 것일까? 그것은 너희가 생각하는 나의 제자가 되는 삶은 너희가 생각하는 바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제 내가 하는 말을 통해서 올바르게 깨달으라는 것이다.
단언컨데 예수를 믿는 것이, 신자가 되는 것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결코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오늘도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는 중대한 진리는 진정한 믿음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기독교라는 종교안으로 들어와 한 종교를 믿는 종교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직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자들이 아직 아닐 수 있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준비 단계에 있으면서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일 뿐인, 불신의 자리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네가지 밭의 비유를 들어 중요한 주제를 설명하신 적이 있다. 길가와 그리고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을 설명하셨다. 모두 말씀을 받은 자들의 마음과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 비유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말씀을 수없이 듣기는 했지만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혼이 있고 또 말씀을 들을 때 한순간이지만 깨달음을 통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지만 환난이나 핍박이 오자 곧 넘어져 버리는 영혼도 있었다. 또 말씀을 경청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이익에 대한 유혹에 넘어지는 영혼이 있다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받은 자들이 아니고 따라서 그들이 말씀을 듣는 자리에까지는 나왔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 참된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은 아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좋은 땅, 즉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 백배 육십백 삼십배로, 정도의 자치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그 삶에 열매로 결실하는 자임을 주께서는 강조하셨다.
긴 시간 동안 열매가 맺혀지는 그 모든 수고로운 과정을 견디어 내고 마침내 결실한 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타락하여 다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배도자들 가운데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뒤로 물러간 자들이 있다고 히브리서 6장은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주께서 나는 너희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하신 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내어 쫓았으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도 있다고 주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서는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은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들 속에서 형통과 번영과 안락을 그저 무사안위만을 꿈꾸며 편안한 길로 가는 것만이 결코 그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주의 이름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으며 조롱을 당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끝까지, 그 고난이 그 괴로움과 고통이 얼마나 길든 간에 마지막 순간까지 견디는 자 라는 것이다.
구원 받은 자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인내하고 견디는 자임을,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는 자임을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왜 그들이 가진 믿음이 온전한 믿음일 수 없는 지를 설명하시면서 제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이라고 말씀 하셨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의 숭고한 삶과 사랑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내가 호의적으로 그것을 받아 들였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결코 믿음이 될 수는 없음을 주님께서 이 한마디의 말씀의 의미를 통해서 적시하신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고 ‘이 종교가 가장 나에게 맞는 것 같아’ 라는 느낌만이 당신의 신앙을 대변하는 고백일 뿐이라면 단언하건데 당신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진실된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진리가 우리에게 증거하는 그 삶의 한복판에 거하는 것이다. 믿음을 지키기 위한 숱한 고난과 불이익과 억울함과 핍박을 견디는 것이다 끝까지 신앙의 그 자리를 지켜 내는 것이 말씀 안에 거하는 주께서 바라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믿음은 요령을 부리거나 쉬운 방법을 찾거나 길이 막히면 쉬운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직하게 바보처럼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계속 그 길로 가는 것이다. 다른 길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 해 주고 우리를 칭송하며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상식이 통하는 삶이 결코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참된 복음 안에 거하기 위해서 교회의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했다. 더 나은 성공을 검어질 쉬 있는 기회, 혹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더 좋은 직장과 더 좋은 조건의 결혼의 모든 기회들과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모든 절호의 기회들을 모두 포기 해야만 했다.
그것이 주의 말씀 안에 거하는 믿음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그냥 믿기만 하는, 자신이 신앙을 가진 자라는 어렴풋한 자의식만으로 신자라고 생각하는 자가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 참된 성도라 불리우는 자들의 삶인 것이다.
주님의 말씀안에 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가 언제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었던 자들, 내게 이익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살 길이 막막해져도 도무지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아무런 기약이 없어도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길이라면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사람들,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각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을 그 참 제자됨의 올바른 조건이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성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면서도 믿음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참 믿음일 수는 없는 것이다.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전혀 기독교를 대적하지 않고 참된 진리를 거부하지도 않을 수 있다. 간혹 빠질 때도 있지만 비교적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을 하며 올바른 교리를 믿고 이에 동의하고 부분적이긴 하나 이를 추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도 전혀 그리스도에게 의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신자가 된 것은 아니다.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며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합당한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며 그 말씀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주께서는 분명히 내 말에 거해야 참 참 내 제자가 되고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냥 주님을 믿는다고 주님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그들의 믿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계심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안에 거하는 삶은 때로 막대한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만 하는 삶인 것이다.
귀한 깨달음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 진리의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살아내야 믿음인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야고보서 1장 23절에서 25절을 보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이 질문을 진지하게 우리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진리 안에, 그분의 말씀 안에, 그의 계명과 율법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말씀안에 거하며 순종하기 위한 치열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기 위해서 온전히 그분을 의지하기 위해서 지극히 위험한 자리로, 어쩌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자리로, 나를 지킬 수 없는 자리로 내 자신을, 우리의 자녀들을 내 몰수 있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견고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믿는 것인가? 무엇이 진정한 성도의 삶인가? 거해야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우리의 평생에 삶이 묶이고 꾸준히 그 말씀의 영향 아래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렇게 살 수 없는 무수한 변명과 핑계 뒤에 나를 숨기고 있는 것은 내 말에 거하는 신앙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씀에 매이고 묶이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계명 아래 머물고자 하는 삶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참된 은혜도 가슴 뛰는 소망과 영적인 희열과 하늘의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우리의 삶이 미지근 한 것인가? 왜 고난 가운데서 조차도 약속하신 넘치는 하늘의 위로는 내게 부어지지 않는 것인가?
왜 여전이 나의 삶은 지리멸렬하고 구태의연함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수 십년을 그렇게 교회안에서 거룩해 보이는 종교인의 삶을 살아왔건만 왜 우리는 여전히 많은 물음표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왜 우리에게는 거룩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참 제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할 때가 아니요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할 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함으로 우리가 신자가 되었다면 그 신자됨은 다시 우리가 그 말씀안에 힘써 거함으로 증명되고 그 믿음은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에 뚜렷한 변화가 있고 그 변화가 순간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몇년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고 계속 되어져 간다는 것이다. 그 말씀 안에, 그 진리 안에, 그 원리와 원칙 안에, 그 믿음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참 제자 된자들의 뚜렷한 삶의 모습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과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냥 단순히 예수를 믿고 있다고 여기는 자신의 마음과 다짐이 아니다. 실제로 그 믿음 안으로 들어가서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지극히 위험하고 힘들고 어려운 길로 주를 의지하여 들어가는 것이다.두 손에 모든 것을 다 쥐고 있으면서 주를 좇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 내려 놓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제껏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나는 것이 믿음이다.
유명한 곡예사가 있었다. 그는 방금 나이야가라 폭포 위를 줄을 타고 건너간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묘기에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박수를 보내는 많은 사람들 중에 이 곡예사가 한 사람을 지목에서 내가 당신을 업고 안전하게 이 줄을 다시 건너 반대편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믿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히 내가 지금 두 눈으로 당신의 곡예를 보았으니 당연히 믿는다고 대답했다. 다음 순간 이 곡예사는 손을 내 밀어서 그럼 내 등에 올라 타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 났다.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흔한 예화 속에서 그러나 흔하지 않은 고뇌를 가져야 할 것이다. 무리 속에서 곡예사의 목숨을 건 줄타기를 보며 박수를 보내고 즐거워 하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곡예사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일은 무리 속에서 박수를 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으면 그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지금 어떻게 증명되고 있고 나타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견고한 지속성이 우리의 삶에서 유지되고 있는지 냉정하게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씀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 없으면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이 믿음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에 업혀서 이 험한 세상을 지나갈 그 믿음이 우리에게 없다면 그것은 믿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보편적인 믿음은 아주 흔하디 흔하다. 이 자리에 우리가 모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교회에 오신 것도 내가 탄 지하철이 불타 버리거나 내가 탄 버스가 폭발하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 때문이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도 믿음 때문이다. 구원 얻을 수 있는 믿음이 그런 확률 따위 정도일까? 그 정도의 믿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삶을 하나님께로 부터는 얻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안전한 믿음을 원한다. 가족과 나의 안전이 보장된 믿음을 선호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 그런 믿음을 말씀하고 있지 않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라. 믿음으로 인해서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아야 했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믿음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진정으로 맡기고 있는가? 무서운 굉음을 내며 물안개를 피우는 폭포를 아래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등에 업혀 인생을 건너 갈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을 여러분은 과연 소유하였는지 생각해 보라. 믿음은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석달을 굶은 사자 굴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법궤를 매고 맹렬하게 흐르는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돈인가? 세상에서의 성공을 검어쥐라고 말씀하시는가? 예수께서 계속 강조하신 바가 무엇인가?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내가 하늘의 빵이요 영생하는 생명의 물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를 죄에서 영원한 저주에서 건져낼 메시야임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 믿음 안에 영원히 거하며 내 말을 믿고 나에게 온전히 의지하라는 것이다. 참된 믿음을 가질 것을 줄기차게 주께서는 말씀하고 또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에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보자. 어려운 것을, 힘든 것을, 우리를 괴롭히는 환경을 도무지 감당해 내지 못한다. 피해가려 하고 도망치려 하고 돌아 서 버리면 그만이라 여긴다. 쉬운 길만을 찾으려 한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어떤 문제 속에서도 어떤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 속에 거할 수 있는 믿음, 그 순교적인 믿음, 거기까지 감당해 낼 수 있는 믿음이다. 지금은 아직 그정도의 믿음은 아닐찌라도 반드시 그 믿음의 정도에 이를 수 있어야 그것이 성도의 믿음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 제자’ 의 믿음인 것이다 그냥 제자가 아니다 성경을 잘 보라 ‘참 제자’ 가 되는 것이다. 그냥 신자가 아니라 진정한 신자, 그냥 믿음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믿음을 가진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세월에, 얼마나 시간이 더 흘러가야 우리가 그런 믿음을 소유하게 될까? 우리에게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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