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침, 그리고 흙..

2015.03.02 10:16

SDG 조회 수:2178

요한복음 9장 6절과 7절을 보면 예수께서 날때 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소상히 소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분께서 땅에 침을 뱉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 눈먼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내어졌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가기 길로 가서 씻고 보게 되어 왔더라’


주님께서 치유의 능력을 행하실 때 얼마든지 말씀만으로 가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독특한 행동으로 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은 복음서의 곳곳에서 소개되고 있다. 

마가복음 7장 33절에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이 어눌한 자를 고치실 때,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라고 이러한 주님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8장 23절에서도 소경을 고치시면서,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라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같은 주님의 치유의 행위를 보라. 침을 뱉어 혀에 묻히시거나 눈에 직접 침을 뱉는 행위, 그리고 본절에서처럼 이번에는 침을 진흙에 뱉어 그것을 이겨 눈에 바르시는 행위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우리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치료의 방법이다. 우리가 보기에 다소 꺼림직 하고 미련해 보이며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유치한 방법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왜 조금더 세련된 방법으로, 얼마든지 말씀만으로 고치시던지 아니면 그냥 눈을 손으로 만지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셨을 터인데도 주께서는 왜 이러한, 조금은 유치하고 거부감이 생기는 방법들을 동원해서 치유를 하신 것일까?


실상은 추악하고 부패한 죄인들인 우리들이지만 이러한 우리 자신들의 본 모습과는 달리 우리는 세련되고 아름다우며 지적이고 우아한 방법들을 더 좋아한다. 내가 믿는 복음이 그렇게 지적으로 보이고 그렇게 가치있고 품위있게 보이기를 좋아한다. 예배도 설교의 내용도 찬양도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의 수준이나 심지어 예배당의 규모와 모든 시설들도 우리의 품격을 높여 줄 만한 것들이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을 다루는 문제는 그렇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이 결코 아님을 깊이 생각 해 보아야 한다. 

복음은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자들을 위해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구원과 영생을 수혈하는 도구이다. 

설교는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의 표현처럼 죽어가는 자가 죽어가는 자에게 하는 것처럼 처절한 것이다. 

예배는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의식 하면서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의 가장 진실됨이 담겨진 행위이다. 세련되고 아름답고 중후하고 우아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짐승의 울부짖음이 가득하고 피 비릿내가 진동하는 성막 안의 풍경이 세련되어 보이고 우아해 보이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주님의 생애가 그렇고 주께서 사용하신 기적의 도구들이 그렇다. 주님께서는 돌맹이를 금덩어리와 보석으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 이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단 한번도 그런 이적을 보이신 적은 없으셨다. 물을 포도주로 그리고 오병이어를 남자만 오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은 행하셨어도 그리고 자신의 살과 피를 유대인들의 주식인 빵과 포도주로 기념하라고는 하셨어도, 그 이상의 어떤 가치있는 물건들을 만드시거나 황금 덩어리로 변화 시키시거나 매우 가치 있는 물건들을 사용하셔서 진리를 교훈하신 일은 행치 않으셨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형상화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유하기 위한 뱀의 형상을 왜 황금으로 만들지 않고 구리로 만들라고 명하셨을까? 가장 비천하고 평범한 것들을 도구 삼아서 주께서는 언제나 의미 있는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다. 그 이유는 놀라운 그 이적의 주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신 뜻이 아니었을까?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주목하는 것임을 웅변하시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치료의 행위를 통해서 주께서 선을 행하고자 하신다면 그 어떤 것도 선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셨다. 하찮은 침과 진흙이라 할지라도, 38년 된 가망 없는 환자와 12년 동안이나 모든 사람들이 불결하게 여기는 혈루증으로 고통 당하던 여인이나, 남편이 다섯이었던 여인까지, 창녀이며 세리며 모든 강도와 살인자까지 모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작은 우주라고 칭하는 인간의 몸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재료가 아닌 바로 흙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창조주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재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가 관건이 아니다. 

누가 그 일을 행하시는 것인가, 그 주체가 중요할 뿐이다. 누가 우리를 붙드시고 누가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이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믿음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되면 어리석은 인간들은 진흙에 능력이 있다고 심지어 우리의 침에도 능력이 있다고 믿고자 할 것이며 지금도 실로암에 신비한 능력이 있어 그 물로 씻어 백내장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은 한계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못하고 다른 것을 더욱 중요시 하고 우상시 하며 신성시 하려는 인간의 아둔함은 교회안에 존재하는 뿌리 깊은 우상숭배이며 미신적인 요소들이 되어왔다. 

기복적인 목적으로 절기를 지키고 일천번 새벽기도를 드리고 무엇인가 특별한 헌신을 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 이러한 모든 미신적인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의 가치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 위에 두려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눈에 보여지는 현세적인 것의 가치를 추구하게 될수록 반드시 변질되고 타락할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은총은 심리학과 정신 의학을 통해서, 흥겨운 찬양을 통해서도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일 뿐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아름다워야 하고 무엇인가 숭배할 만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교회는 클 수록 좋은 것이고 신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어야 믿을 만한 목회자이고 (그러니 목회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위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명문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넉넉하게 살아야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구원은, 영생은 그렇게 이 땅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로 그 가치를 매김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앙의 구색을 갖추려 하지 마라. 신앙은 어떻게 보여지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앞뒤로 흔들어서 요제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면 그대로 하는 것이다. 위 아래로 들었나 내렸다를 반복하면서 거제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하시면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짐승의 피와 내장과 그 기름을 드리라고 하면 무슨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재물로 바치라고 하실까? 피를 바른다고 거룩해 질까? 라며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재단하지 말고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여리고 성을 침묵 가운데 돌라고 말씀하면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다. 횃불을 손에 들고 나팔을 불고 외치며 항아리를 깨뜨리라고 하면 그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승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믿고 받아 들이며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침을 진흙에 뱉어 이기신 후에 눈에 발라서 소경을 고치셨다면 그대로 그것을 믿는 것이다. 주님의 행위를 판단하지 말고 주께서 행하신 일과 그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어떻게 소경을 고친다 말인가? 하고 진리에 걸려 넘어지면 그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있을 뿐이다.


침과 진흙 ... 복음은 그런 것이다. 

가장 하찮은 것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나오는 이 진리는 주님의 치료의 행위 속에서도 그렇게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을 우리는 결코 가볍게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2 잠언 묵상 82 SDG 2015.09.02 1633
121 짐언 묵상 81 SDG 2015.08.22 1501
120 잠언 묵상 80 SDG 2015.08.22 1686
119 잠언 묵상 79 SDG 2015.08.22 1619
118 잠언 묵상 78 SDG 2015.08.22 1631
117 잠언 묵상 77 SDG 2015.08.22 1916
116 잠언 묵상 76 SDG 2015.08.14 1657
115 잠언 묵상 75 SDG 2015.08.14 1621
114 잠언 묵상 74 SDG 2015.08.14 1495
113 잠언 묵상 73 SDG 2015.08.14 1364
112 잠언 묵상 72 SDG 2015.08.14 1463
111 잠언 묵상 71 SDG 2015.08.14 1695
110 잠언 묵상 70 SDG 2015.08.06 1417
109 잠언 묵상 69 SDG 2015.08.06 1766
108 잠언 묵상 68 SDG 2015.08.06 1492
107 잠언 묵상 67 SDG 2015.08.03 1535
106 잠언 묵상 66 SDG 2015.08.03 1474
105 잠언 묵상 65 SDG 2015.08.03 1449
104 잠언 묵상 64 SDG 2015.08.03 1454
103 잠언 묵상 63 SDG 2015.07.28 1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