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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란 무엇인가

2015.05.07 19:52

SDG 조회 수:2706

*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문병호 교수, 총신대 신대원)

 

 

2012년 7월 5일 개혁주의 신학대회가 열렸다. 신학대회 발제 논문을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

 

미래 100년을 향한 총회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신학과 신앙의 요체 -

 

 

I. 들어가는 말: 개혁주의, 100년의 도전

 

“개혁주의”는 무엇인가? 자주 이 말은 “칼빈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개혁주의는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라는 모토로 집약된다. 오직 성경 안에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모토가 다 들어 있다.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할 때 그것이 가장 신학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신학은 성경에서 시작되고 성경에서 머문다.

 

칼빈의 영향 가운데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복음만을 성경적 복음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해 매우 열린 입장을 진키고 성경적 복음을 성경의 복음에 국한하지 않는 포괄주의, 혼합주의, 다원주의와는 분명 대조된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복음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참 신학theologia vera과 참 경건pietas vera을 엄밀하게 추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보수주의” 혹은 “근본주의”라는 이름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개혁주의가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고유한 기원과 근원에 충실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참 근본을 교회의 서고 넘어지는 조항으로서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의 이러한 보수적 근본적 성향은 단지 성햐에 그치지 않고 신학적 정밀성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현저한 예를 16세기 말 이후부터 칼빈의 후예들 즉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개혁주의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에서 발견하게 된다.

 

본 교단은 100년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다윗과 솔로몬의 경건도 100년이 가지 못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역사는 여러 부정적 선례를 보여주지만 우리가 새겨야 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초대교회 백년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말씀의 일점일획이라도 가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분명하게 믿고 모이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교회-무엇보다 성령의 감동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가장 뚜렷한 푯대를 바라보게 된다.

 

개혁주의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는다(딤후 3:16). 그리고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딤후 3:14)이 성경의 진리이며 성경적 진리라는 것을 고백한다. 본고는 개혁주의의 이러한 본질에 주목하여 그 역사적 특성을 우선적으로 고찰한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주요한 교리 중심으로 전개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가 서 있는 자리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일별함으로써 확정한다.

 

 

2. 개혁주의와 개혁신학

 

2.1. 정의적 규정: 개혁주의의 객관성

 

최광의로 개혁주의를 이해하는 입장은 성경적 진리와 정통 신학 그리고 삶을 망라하는 개념이라고 본다. 개혁신학자 오스트 헤번은 그의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게 개혁주의는 고대 이스라엘과 초대교회의 고난 받는 신앙을 마땅히 감사하고, 어거스틴과 루터와 함께 서서 죄와 주권적 은혜에 관한 교리들을 견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전 생애를 복종시키고, 성령을 은사와 은총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칼빈과 그 후예들에 관해 언급이 없는 것은 이를 당연히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를 광의로 이해하는 경우 자주 이는 종교개혁Reformation과 동일시된다. 저명한 역사학자 오버만은 개혁주의를 종교개혁의 한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칼빈의 종교개혁을 루터의 종교개혁과 도시 종교개혁을 잇는 제3기 형태로 여기고 이를 피난민 종교개혁이라고 불렀다. 오버만은 종교개혁의 본질을 권력과 허장상세로부터 벗어나 설교와 기도로 나아가는 전환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칼빈은 이러한 전환을 신학적으로 승화시켜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법으로 여기고 이로써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풀어내었다는 점에서 가히 새로운 단계의 종교개혁을 수립했다고 보았다. 오버만이 개혁주의를 종교개혁의 일부로 여겼다면 오스크 헤번은 역으로 종교개혁을 개혁주의의 일부로 파악했다.

 

대체적으로 개혁주의는 협의로 이해된다. 이 경우 개혁주의는 루터란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칼빈과 그를 잇는 후예들의 신학 즉 칼빈주의를 지칭한다. 이런 입장을 개진하는 학자들은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 쯔빙글리와 불링거의 쮜리히 종교개혁과 오이콜람파티우스의 바젤 종교개혁 등 스위스 종교개혁을 아우르는 경향이 있다. 칼빈신학자인 맥닐John T. McNeill이 지적하였듯이 스위스의 도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언약, 성령, 성례, 권징 등을 다루면서 칼빈 이전의 칼빈주의의 특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칼빈의 사상이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세계관을 창조, 계시, 구원의 전 영역에서 가장 뛰어나게 추구,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life-view, world-view. 그것은 관점 자체를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관점에 따른 사유 즉 사상 자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칼빈주의에 관한 고전적 명저를 남긴 미터Henry Meeter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언급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상이다."

 

엄밀히 말해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사상이 아니라 칼빈에 의해 조명된 하나님의 사상을 계승하여 체계적으로 심화시킴으로 역사상 개혁주의 곧 칼빈주의를 수립하였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일체성과 연속성은 그들이 공유한 하나님 사상 그 자체에 객관적으로 놓여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대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방법에 있어서까지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bnty을 본질로 삼고 우리의 주관을 배제하는 칼빈주의의 객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자기 부인에 기독교 철학이 가장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의 근저에는 칼빈의 객관성이 놓여 있다.

 

 

2.2. 개혁주의 근본원리

 

2.2.1. 다양한 조명 그러나 하나의 근본원리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리이쓰J. H. Leith는 개혁주의를 시대별로 구분한다. 대체로 개혁주의의 본질, 원리, 특성 등을 논할 때 학자들은 그 신학적 고유성에 주목하고, 거의 예외없이 칼빈의 신학에 그 연원을 문의하다.

 

원전 중심으로 기독교 전 역사를 교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한 역작을 쓴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칼빈의 신학을 다루면서 말씀과 하나님의 뜻, 말씀과 성령,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감추어진 그리고 계시된 영원한 하나님의 뜻,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제하에 지면을 다수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본질이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과 순종에 있다고 표명한다.

 

바빙크는 루터주의가 인간론적이라면 개혁주의는 신론적이며, 루터주의가 칭의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여긴다면 개혁주의는 선택을 교회의 심장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개혁주의가 사실 자체보다 하나님의 뜻을 강조한다는 그의 사상은 오스트 헤번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그는 창조, 구속, 교회, 국가, 삶이 모두 하나님의 작정과 정하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전체적으로 계시하며 그것이 언약 가운데 특징적으로 전개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영원한 작정을 이루는 경륜과 섭리는 아들의 구원에 있어서 절정에 이른다. 삼위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을 협약하시어 구속자는 제2위 성자 하나님, 구속방식은 그의 대속, 구속백성은 선택으로 정하셨다. 이러한 구원협약이 역사상 성취되는 경륜이 언약이다. 칼빈과 뚤레틴은 그들의 대작에서 언약을 신구약 전체로 이해한다. 개혁주의를 그 신학적 특성에 관련해서 말할 때 언약신학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강요에서 언약신학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전개되는 신구약에 관한 장들은 기독론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칼빈은 신구약이 그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윤에 있어서는 다양하다는 원리를 분명히 제시한다. 신구약의 실체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가 말씀의 실체라는 측면에서 칼빈은 율법과 복음을 이해한다. 율법은 언약의 법으로서 약속을 담고 있고 복음은 그 약속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소식으로 정의된다.

 

칼빈에게 신구약, 복음과 율법의 언약신학적 이해는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라는 개념 가운데서 뚜렷이 부각된다. 밀러는 이 부분에 착안하여 칼빈과 칼빈주의의 연속성을 예정에 대한 칼빈의 기독론적 이해에서 찾았다. 밀러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이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을 성취하는 사역을 이루기 위해 필연적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는 점을 칼빈의 언약신학을 다룸에 있어 가장 주목해야 한다고 하였다.

 

칼빈의 언약신학은 그의 신학체계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사적-구원론적 원리로서 읽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후대 언약신학자들에게 미친 칼빈의 영향을 파악할 때 그 실체가 온전히 파악된다. 근자에 언약신학의 조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칼빈에게는 이런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그가 후대의 언약신학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비록 그 성경은 다르나 칼빈의 언약신학이 대륙과 영국의 신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칼빈은 속조론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언약의 두 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타락한 인류는 전적인 은혜로 인류와 언약을 맺으시고 택한 백성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 선물은 그저 주시는 것이나 그저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고통을 당하신 수종과 율법을 모두 행하신 순종을 통해 의를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친히 주님께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셔서 아버지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택한 백성에게 전가하심으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모두 성취하셨다.

 

이것이 새 언약 곧 피의 언약이다. 칼빈에게 있어 새 언약은 모든 언약의 성취로 순종의 조건성과 전가의 무조건성을 모두 함의하고 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의 성취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며 성도의 구원의 성취이다. 그것이 율법의 약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구약을 완성한 신약의 경륜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터가 말한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근본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로부터 이후 칼빈주의자들이 교리화한 성경중심, 하나님의 중심,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의 절대성, 성도의 감사와 책임이 모두 흘러나온다.

 

개혁주의의 하나의 근본원리는 곧 성경이다. 언약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전제로 함의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를 언약신학으로 특정할 때 그것은 sola Scriptura의 원리를 되새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개혁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은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극적으로 변증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2.2.2. 개혁주의에 대한 오해들

 

미국의 칼빈신학자 헷셀링크 John Hesselink는 자신의 책 「개혁되고 있음에 대하여」에서 개혁주의에 대한 열두 가지 오해들을 열거하고 이를 조목별로 바로잡고 진실을 변호하였다. 그가 제시한 열두 가지로부터 주제를 빌어 와 다음과 같이 개혁주의의 특성을 정리하였다.

 

첫째, 개혁주의는 그것을 명기한 화란 개혁교회, 독일 개혁교회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칼빈의 신학을 근간으로 말씀에 따른 개혁을 표방하는 교회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장로교회는 그 대표적 예이다.

 

둘째, 개혁주의는 신경이나 고백에 매여서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개혁주의는 특정한 형편에 따라 교회정치 구조를 독단적으로 추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일을 가로막지 않는다.

 

넷째, 개혁주의는 공식적 예배 양식이나 성례를 무시하지 않는다.

 

다섯째, 개혁주의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신학방법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섯째, 예정론은 개혁주의에 고유한 교리가 아니라 성경적 교리이다.

 

일곱째, 개혁주의의 전적타락 교리는 사람이 무가치하다거나 전적으로 무익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여덟째, 개혁주의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율법주의와 율법폐지주의 모두 거부한다.

 

아홉째, 개혁주의 언약사상은 자만과 배타적인 성향을 낳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사랑으로 만세 전에 정한 뜻을 친히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 앞에서 겸손과 감사를 배우게 한다.

 

열째, 개혁주의는 문화, 경제, 정치, 사회 등 세상에 속한 영역을 교회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서 거부하지 않는다.

 

열한째, 개혁교회는 성령의 위격과 사역을 등한시하지 않는다.

 

열두째, 개혁교회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어떤 현학적 틀에 갇힌 맹목적 독단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카이퍼가 프린스턴에서 행한 스톤 강좌에서 보여주었듯이 칼빈주의는 신학적 특성으로만 로마 가톨릭주의나 루터주의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헷셀링크가 위의 책 마지막 부분에서 개혁주의를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삶 중심으로 파악한 것은 합당했다. 사실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진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교리이며, 신학이다. 과연 오직 성경을 근본 원리로 삼는 개혁주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이를 답하는 길은 칼빈의 신학으로부터 추구되어야 한다.

 

2.3. 칼빈의 신학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는 칼빈의 신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학자로서 목회자, 설교자, 주석가였다. 칼빈의 신학을 14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가르침이 존재적, 지식적, 도덕적 관점으로 고찰된다.

 

둘째,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고 일하심, 즉 삼위일체 교리가 존재적이며 경륜적으로 파악된다.

 

셋째, 특별은총과 함께 일반은총이 강조된다.

 

넷째, 계시와 은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역사한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다섯째,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조명되어 감화받은 심령이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에 이르게 됨이 강조된다.

 

여섯째, 언약의 두 요소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논해진다.

 

일곱째,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써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 하고 받아주신다는 이중적 은혜가 역동적으로 논의된다.

 

여덟째,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분과 연합한 성도가 그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분께로 자람을 성화의 핵심으로 여긴다.

 

아홉째,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가 제시된다.

 

열째,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로 여긴다.

 

열한째,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성도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성도의 표지로서 부각시킨다.

 

열두째, 교회의 본질은 그것인 한 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지체된 백성들의 연합체라는 사실에서 파악된다.

 

열셋째, 성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연합이 제시된다.

 

열넷째, 시민 국가의 삶의 원리를 사랑과 절제와 공평에서 찾음으로써 자연법과 하나님의 법과의 본질적 일치를 추구한다.

 

필자는 칼빈신학을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성경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하나님의 주권적 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조명된다. 기독론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심이 드러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신학 즉 송영의 신학, 겸손의 신학을 추구하게 된다.

 

2.4. 개혁신학의 원리와 중심 교리

 

2.4.1. 신학의 원리: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계시 이해

 

칼빈 신학이 그의 후예들에 의해 칼빈주의로 수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신학의 원리 혹 계시의 원리라는 개념이 신학의 서론으로서 논의되었다. 이는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존재의 원리는 하나님 지식 즉 계시는 스스로 영원히-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존재한다고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계시하시고, 일하신다. 이러한 존재와 경륜의 삼위일체로부터 이 원리는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렇듯 스스로 존재하는 계시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믿음으로 수납된다. 이를 인식의 원리라고 한다. 오직 계시된 계시만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이를 모형계시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 주신 계시이다. 성경은 이러한 모형계시의 기록이다. 이것은 원형계시를 모두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이지만 진리이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수납된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조명으로 떨어지고 그 감화로 들어온다. 이러한 수납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세상의 지식이 이성으로 추론된다면 성경의 지식은 오직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칼빈은 이러한 계시의 원리가 삼위일체론적이며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성부 하나님은 계시의 시작 혹 뜻이며, 성자는 계시물 즉 말씀이며, 성령은 계시의 작용이다. 아들은 이 땅에 오신 계시 자체이며 그 완성이시다. 그리하여 그는 생명의 빛이시며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Deus in se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Deus pro nobis으로 이 땅에 오신 구속사적 사건이다. 성육신 계시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로써 드러내심이 곧 이루심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이 계시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의 역동적 관계에 주목하면서 기독교강요의 구조를 세웠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사람의 인격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 고유한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한에 있어서 그러하다. 이러한 칼빈의 이해가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로 수립된 것이다.

 

2.3.2. 개혁교리

 

개혁신학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듯이 죄, 은혜, 감사를 담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사상과 개혁교회들의 신앙고백서와 신경들을 참조하여 개혁주의를 특징짓는 가르침을 몇 가지로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성경의 성령 영감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

언약신학: 구속사적-구원론적 이해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 위격적 연합 교리

보혜사 성령의 사역: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전적타락과 전적은혜

율법과 복음의 역동적 이해

교회의 본질과 표지, 그리고 은혜의 방편

 

 

3. 결론 :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한국 장로교는 선교 130년 총회 수립 100년의 역사를 가진 역사상 교회이다. 우리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수립된 개혁주의를 여러 경로를 통해 받아들였다.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초기 선교사들은 개혁신학에 대한 식견이 깊었으며 신앙 또한 그에 걸맞게 경건했다.

 

우리 교단은 12신조의 서언에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공표함으로 신학과 신앙의 자리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신경과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에 전개된 신학은 교단신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죽산 박형룡 등에 의해 굳건하게 견지되어 왔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건들은 칼빈의 신학을 계승한 존 녹스의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신학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를 성경이라고 명명한 제 일장에서 분명히 천명한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완전하고 무오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된다. 성경 자체가 성령해석의 법칙이 된다. 성경의 궈위는 그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개혁주의의 입장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비한 예정의 교리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예지예정론을 반대하고 선택과 유기가 만세 전에 미리 정해졌다는 이중예정을 뚜렷이 공표한다. 이것이 전적타락 교리와 함께 천명된다. 타락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해서 은혜가 아니면 언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 교회는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견인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유일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모인 언약 공동체이다.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는 모두 보편교회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다.

 

우리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는 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분명하다. 그것은 언약신학으로 가장 뚜렷하게 특정되는 개혁신학과 신앙-곧 역사상 그 정통성이 변증된 개혁주의이다. 우리의 신학을 정초한 죽산 박형룡 박사는 개혁주의의 신학원리를 분명히 개진하여 오직 계시를 믿는 믿음으로만 신지식을 수납하게 됨을 강조하였다. 죽산은 “정통신학은 신구약 성경을 천계와 영감으로 말미암아 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인정하는 초자연적인 성경관을 가진다”고 피력하여 우리의 자리매김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원리에 정확하게 잇대어 있다.

 

 <회복의 교회 자료실에서 옮겨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