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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왜 경제 활동을 하는 것입니까.. 요한일서 3 1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이 세상에서의 우리에게 주신 재물은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쓰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형제의 궁핍함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로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2 15~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이 야고보서의 유명한 말씀을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바로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사야 58 7~11절은 말씀합니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땐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은 신자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고 얼마나 놀라운 긍휼과 자비를 받았는지를 진리 안에서 깨닫고 경험할수록 우리 안에서 더욱 강해지고 더 열렬하며 뜨거워지게 되는, 신자의 삶이 이 땅에서 지향하게 되는 매우 분명한 필연적인 거듭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지독한 자기 사랑의 부패한 본성을 가진 타락한 인간은 긍휼을 베풀 의지도 마음도 현저히 부족합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가장 불쌍히 여기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을 경험한 자가 되어야 하고 그 긍휼을 거듭 우리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체험하며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잊을 길이 없는 감동과 감화를 받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사랑의 욕망의 덩어리인 우리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타적인, 자기희생적 섬김의 삶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마침내 주님처럼 살기를 기도하며 은혜를 구함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섬김과 희생과 긍휼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명확한 목적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경험하고 우리가 죄를 지어 넘어질 때마다 참회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됨으로 인해서 우리 또한 그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돕는 자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한 인격 안에서 충만하신 은혜로 잘 유지되는 자의 마음은 언제나 긍휼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도 거듭되는 은혜의 체험을 통한 자기 깨어짐이 없이 여전히 이기적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영혼의 삶에는 긍휼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기적인 삶의 메마르고 척박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기적이며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들 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맛본 자들은 결코 그 자신만을 위하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긍휼은 이제 우리에게서 흘러넘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을 전달해야 할 자들을 향해서 힘을 다해 그 사랑을 전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이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고 그 긍휼히 여기심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며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깊이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믿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마음이 이어질 때 그리스도인에게 긍휼의 성품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힘써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오늘도 충만하신 은혜가 공급되어 나 같은 죄인에게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지고 있음을 기억하여 언제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든지, 그것이 아니면 긍휼의 여기는 외형적인 삶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다른 긍휼을 베푸는 외형적인 열심히 그에게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 열심히 주일이면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그의 삶의 갈피 속에 그 누구를 향해서도 긍휼을 베푸는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에게 베푸신 그 생애적인 긍휼히 여기심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임을 방증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긍휼히 여김은 우리가 실천하는 긍휼과 비례하게 됩니다. 아직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이 어떤 긍휼이 여김을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피상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 자는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흘러넘치는, 마음에서 비롯된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에 그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의무감이든지 아니면 인간이 가진 일말의 박애정신이나 인류애 차원에서의 도덕심의 발로일 뿐이며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자기만족 차원에서의 자기 의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죄 아래서 우리가 얼마나 악한 삶을 살았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며 얼마나 우리의 모습이 추악했는지를 기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 아래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얼마나 놀라운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생애적으로 그 감격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그에게서 진정한 긍휼의 마음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비참함 가운데 고통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지체들을 바라볼 때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셨던 바로 그 긍휼의 마음이 우리에게 발동하여서 그 마음으로 기꺼이 긍휼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달려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고 몸이 가고 우리의 물질이 흘러가서 긍휼이 여김이 그에게 닿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주께서 활동하시던 유대 사회에 수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누구보다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외식하는 자들이었고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자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독한 종교적 형식주의자들이었고 오직 외형적인 것 만을 추구하는 속은 텅 빈 껍데기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에게는 가난한 심령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은 애통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온유하지도, 진정한 의에 주리고 목마름 조차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율법적이기는 했어도 그 어떤 긍휼도 찾아볼 수 없었던 차갑고 메마른 삶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과부와 고아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고 멸시하고 천대했으며 가난한 자들을 박해하고 그들이 가진 것까지도 빼앗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인들만큼이나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무자비했습니다. 로마인들은긍휼이라는 단어를 경멸했습니다.

 

로마인들 가운데 가정의 가장들은 자식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절대적 권한을 집안의 가장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예나 아내를 죽이고 파는 일도 로마인 가장들에게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와 로마의 문화는 그러했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결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주님은 긍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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