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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띄우는 목양서신37

2018.03.15 10:43

solafide1004 조회 수:1305

<아침에 띄우는 목양서신>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개역한글)

십자가의 형벌은 가장 극악한 죄를 범한 죄수를 죽이는 사형법이었습니다.
이 형벌이 얼마나 잔인하고 극도로 수치스러웠으면 로마인들에게는 이 사형법을 적용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혁명을 꾀한 사람을 일벌백계로 다스리기 위해서 고안된 사형법이 십자가 형이었습니다.
나무에 매 달아 죽이는 이 십자가형의 시작은 일설에 의하면 페르시아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로마가 변형시켜 적용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페르시아 군대에 대해서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끝이 뾰족한 나무에 관통시켜 땅에 박아놓은 것을 보고 로마가 십자가형을 고안했다는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을 고대인들은 가장 혐오스러워하고 끔찍한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다름아닌 그 저주와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 외에는 자신에게 있어 결코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세서리로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와 귀걸이를-이것은 신자로서 바람직한 것은 아니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두대를 작게 만들어 목에 걸거나 전기의자 모양의 귀걸이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형틀이 왜 이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것이 장식품으로 둔갑을 할 만큼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십자가 모양이 갖는 미학적인 매력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나 떠오르는 부인할 수 없는 강렬한 의미 때문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위에 매달려 살찢고 피흘리시며 영원한 죄의 형벌에서 나를 대속해 주셨다는 지워지지 않는 그 감격 때문입니다.

그 형언할 길 없는 십자가의 사랑에 관통당한 사람만이 오매불망 그 사랑과 은혜를 잊지 못하고 늘 울어서 그 눈물이 바다를 이루어도 다 갚을 길이 없는 그 사랑에 완전히 포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과 능력과 영광을 자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 고귀한 신분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자랑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 모든 것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만이 죄인 중에 괴수같고 벌레보다도 못한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한 위대한 사랑의 극치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가장 자신을 빛나게 해 주는 가치를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배움이 깊지 못하고 수려한 외모를 갖지 않았어도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자식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 부모님을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영원한 자랑이 되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의 자녀로 변화된 여러분의 신분을 언제나 자랑스러워 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십자가의 가치는 우리에게 감출 수 없는 자랑인지,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감추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우뚝 세워져 있어야 할 그 피뭍은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 보시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다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