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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띄우는 목양서신58

2018.04.13 09:00

solafide1004 조회 수:1419

<아침에 띄우는 목양서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4, 개역한글)

‘힘쓰라’ 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원문의 의미는 ‘너희는 진지하게 노력하라’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 문헌에서 종종 싸움이나 경기에 관련된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신약 성경에서는 윤리적인 권면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예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달리기 선수가 경기장에서 전력질주를 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며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치열한 경주와 같습니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단 한번의 경기에서 승패가 갈림을 알고 그 경기에 모든 것을 거는 선수의 그 진지함과 열정이 하나님을 신앙함에 반드시 요구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소풍을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의 여정은 매순간이 치열한 전쟁이며 우리를 패배시키기를 노리는 어두움의 세력들과의 숨돌릴 틈이 없는 영적인 격전이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신앙의 길은 힘쓰지 않고는 결코 올바른 믿음의 길로 행할 수 없는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하기에 ‘좁은문’ 입니다.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이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좁은 문을 힘써 구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구원은 분명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작정에 의한 것인데 인간이 구하고자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라고 구원의 좁은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겠습니까..

그들은 바로 자기방식으로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유대주의자들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자들, 하나님에 관해서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있지만 구원의 올바른 길로 행하지 않고 참된 믿음에서 벗어난 다른 길에서 열심을 내는 자들, 그리고 성경의 진리와 정교한 교리를 따라 신앙의 정도를 행하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들어가기를 구해도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란 이 세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몇번 째 사람들일까요..

왜 개혁파 신학과 청교도의 신앙을 추구하는 신앙의 삶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성경은 명백히 말씀하기를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고 그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 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죽음이후에 천국의 문앞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이름이 그곳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길에서 구원을 얻기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황망한 일을 겪지 않고 참된 구원에 이루는 신앙을 위해서는 반드시 안전한 길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길을 우리에게 소상히 알려 준 분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칼빈과 오웬과 번연과 에드워즈, 로이드 존스 같은 분들입니다.

그 길을 정확히 그리고 올바로 알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길로 들어가기를 열심히 구했어도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도에 나타난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운전자는 도로의 표지판을 유심히 살피듯이 진정코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렇게 지성의 불을 환하게 밝혀서 자신이 어느지점을 통과해서 올바로 천성을 향해서 진행하고 있는지를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경기장에 들어선 긴장감 가득한 눈빛의 경주자처럼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결승점을 노려보며 마음을 다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리에 관해서 진지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결국 우리의 믿음은 방황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며 어리석은 열심으로 구원에서 더욱 멀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참된 믿음의 길에서 구원과 성화를 위해 진지하고 올바른 열심을 내고 있는지 깊이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일을 가장 소홀히 여기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삶이 아닙니다.
깨닫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