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설교 한토막>
26절에서도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28절에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십자가에 위해서 영원한 속죄의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 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단번에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항상 가변적이고 불안하며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이라고 하는 것은 신뢰할 만한 것이거나 영구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신앙이 뜨거울 때도 있지만 차갑게 식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은혜가 모두 소멸되고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고 충만한 은혜 가운데 믿음이 견고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라는 말은 우리의 믿음이나 우리의 회개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도 참회하는 기도를 드렸지만 회개는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의심을 하고 회의와 절망과 낙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도, 실패와 좌절에 눈물을 흘리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계요 연약합입니다.
복음이 기쁘고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그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대속의 효력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번에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려 영원히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과 그 평화와 그 기쁨은 누구 안에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왜 절대적인 평화와 기쁨과 영원한 소망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려고 하십니까..
우리 안에는 그런 것들이 결코 영원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며 죄와 뒤엉켜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은 쉬 파괴되고 그 평화는 오랜 시간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구원의 기쁨과 그 평화와 그 안식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것들을 바라고 소망하고 때때로 그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누리며 그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며 인생을 지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지만 구원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단번에’ 라는 말이 해당되는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와 노력과 자신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으로부터 결코 구원을 이끌어 내지 못합니다.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처절한 패배와 실패를 맛보게 될 뿐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손과 발에 못자국을 가지신 채로 하나님 앞에 서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그렇게 보증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대속은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끝이 난 것이고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그 구원의 유효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것입니다.
거듭 죽으실 필요가 없고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또 나아가고 또 나아가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의 모든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회심은 한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다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더러워진 발을 씻는 회개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오직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모든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 이셨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과 동일한 삶을 사시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모든 멸시와 천대와 박해와 그리고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오직 이 한가지 목적만을 위한 삶이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영광과 명예와 권력을 이 땅에서 누리고 맛보기 위해서 오심이 아니라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자신을 드려 위대한 그 대속을 완성하시기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 구유에 가장 낮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야의 삶이셨습니다.
이 진리를 안다면 신자는 오직 한번 뿐인 인생을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 주시기 위해 오직 그 목적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위해서 우리도 그리스도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를 위해 포기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된 이 구원과 영생의 가치를 위해서 오늘도 세상에서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며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이를 위해 죽으셨는데 그 은택을 입은 자들이 영생의 가치와 그 소망을 위해 보다 거룩한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이 땅에서의 육신의 행복과 즐거움과 부와 명예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이같은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생은 주님께서 다 하셨으니 우리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가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까..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목적일까요..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유치하고 천박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한 젊은 부자 관원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리스도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을 때, 그것을 고백하고 믿고 그 가치를 좇을 수 있을 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생에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보다 더 귀한 것이 존재하는 사람은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래서 그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의 조건을 갖추도록 하나님께서 그것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며 그렇게 되기까지 연단하시는 시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인생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주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받아 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지만 빼앗아 가기도 하시면서 그렇게 교만한 인생들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파괴하시면서까지, 그리고 다시 회복시키시고 일으켜 세우면서 바로 이 신앙의 고백을 우리 안에서 완성해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국은 자기 조차도 부인하면서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고 결코 이 세상에서는 평안할 수 없고 안락할 수도 없는 그 좁은 길을 지나 영원히 그리고 찬란히 빛나는 곳에 이르도록 오늘도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