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2 08:21
<묵상, 설교 한 토막>
‘무거운 짐’ 이라고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 ‘방해되는 것’ 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운동 경기를 할 때 옷을 벗고 나체로 달렸던 고대 헬라 문화에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이라고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 ‘쉽게 얽어 매는’, 혹은 ‘달라붙는’ 이라는 의미로 죄와 여러 유혹의 성질을 설명하고 있는 단어인데, 이 단어 역시 경주자에게 방해가 되는 요소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최첨단 운동복은 몸에 매우 밀착되어서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지만 과거의 운동 경기에서는 옷이 달라붙거나 질주를 하는데 팔 다리의 동작을 부자연스럽게 얽어 매는 일들이 있어 앞서 설명한 바대로 고대 운동 경기의 경주자들은 나체로 질주를 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믿음을 경주에 비유하였고 성도를 그 경주에서 뛰고 있는 경주자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주자에게 거추장스러운 옷은 방해가 될 뿐이듯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가장 큰 방해와 훼방의 요소는 바로 세상의 모든 죄의 유혹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는 그저 인생을 즐기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목적인 자들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출발 라인에 서서 총성이 울리면 이내 전력을 다해서 질주를 해야 하는 경주자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42.195 킬로미터를 2시간 대에 주파하기 위해 엄청난 체력 소모를 감당하면서 쉬임 없이 달리는 그 경주자에 성도를 비유했습니다.
경주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주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라톤을 뛰는 선수의 몸에서 지방이 축척 된 부위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수없이 훈련하고 단련한 그들의 몸은 장거기를 달리기에 최적화된 근육으로 다져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운동복입니다.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이기에 기록 갱신을 위해 경주자들이 입는 옷과 신발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첨단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대의 운동 경기에서 옷을 입지 않고 경기를 한 이유는 달리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달리자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고 그래서 아예 모든 옷을 벗고 아무것도 방해되는 요소 없이 경주를 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며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일에 가장 큰 방해의 요소는 바로 죄입니다.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죄의 유혹들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길은 세상에서의 삶을 최대한 단조롭게 한 채로 모든 일에 절제하며 오직 진리에 몰두하고 영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만나야 할 사람까지도 제한을 하고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지체들과 더불어 교통하고 교제하며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평생 진리를 배우고 서로를 돕고 섬기고 의지하며 믿음의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경건에 실패하고 성화가 그토록 더디게 진행되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경주를 하고 있는 자임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자신의 정체와 신분을 망각하고 세상과 자기 자신만을 너무 사랑하며 살아가고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누리고 맛보고 즐길 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과 관심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때로 명예와 물질과 인기와 성공과 이 세상에서의 행복까지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부모와 자식까지도 우선 순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목숨까지도 아낌 없이 주를 위해 드릴 수 있는, 믿음은 바로 거기 까지라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에 물든 오염된 기독교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으로 이 땅을 지나가는 동안 얽매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야 말로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버리고 포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때는 박해의 시대였고 지금처럼 세상에 좋은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 때의 목숨의 가치와 지금이 목숨의 가치가 다른 것입니까..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이 세상 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리의 가치, 믿음의 그 절대적인 가치는 상대주의, 다원주의에 물든 이 시대처럼 한없이 가볍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만큼 위대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를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예배와 교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기꺼이 희생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이 위대한 가치를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버려두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삶을 보면 어떻게 말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동호회에서 취미활동을 하듯이 신앙을 생각하는 그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취미생활도 그렇게 열정 없이 불성실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취미활동을 하는 세상 사람들 보면 그 일에 막대한 물질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얻기 위한 믿음이 취미생활보다 못하다면 우리의 믿음의 정체는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나체로 질주를 했던 고대의 경주자들처럼 믿음생활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기가 이토록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 분주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으며 삶 자체가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가족 중심적이며 자기의 직업, 직장이 우선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삶의 중심추가 완전히 세상으로 기울어져 버린 채 심각한 신앙의 기형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사회를 비롯한 지금의 이 시대는 탈기독교의 시대로 접어든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모든 분야애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타락하고 부패한 정신은 더 이상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고 그렇게 철저하게 인간이 중심이 되어 버렸고 그것은 신자라고 해서 교회라고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닌 시류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진리에 붙들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고 온통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을 좇아 자유분방하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고 그것을 죄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믿었던 신자들은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단순화하십시오. 세상에서 죄에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들을 잘라내고 단절하고 돌아서십시오. 그것이 진정으로 주를 믿는 길입니다. 더 단순해져야 합니다. 모든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 오직 진리에 붙들려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에서 여러분의 영혼이 벗어나 더 깊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영혼이 아니라면 이 경주를 끝마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