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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 토막 392 (히 12:18-24)

2023.09.12 08:21

hc 조회 수:2047

<묵상, 설교 한 토막>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법을 어기면 가차 없이 그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그런 사랑의 하나님으로 처음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잘못 나아가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지엄하신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접근하는 누구라도 죽임을 당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함부로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결코 아니심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율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함부로 다가갈 수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이며 따라서 죄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구약은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런 두렵고 떨리는 그 하나님께서 그런데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아들을 통해 죄인들에게 먼저 자비와 긍휼의 손을 내밀어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다는 이 진리를 이제 성경은 구약의 많은 예언들과 그리고 마침내 신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앞으로 나아와 이를 지킴으로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그 전적으로 타락하며 부패한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이제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지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새로운 언약을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산, 흑암과 흑운, 폭풍 그리고 나팔소리.. 죄인들에게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그 하나님의 지엄하심을 깨닫도록 우리의 손에 쥐어 주신 것이 바로 율법과 계명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주의자들이 가진 가장 큰 착각은 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노력과 의지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율법을 지키는 능력의 정도를 통해서 자기들의 의와 공로를 인정받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착각이며 하나님의 뜻을 전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입니다. 율법과 계명은 우리가 분명히 힘써 지켜야 할 바이지만 인간이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어김으로서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완전히 지킬 수 있으며, 이를 지킬 것을 전제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가 지금 반율법주의 혹은 무율법주의를 말하고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이야말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시내산에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과 같이 지엄하고 한치의 실수나 부족도 허용하지 않는 엄중한 법입니다. 그 법 아래서 어떤 인간도 정죄 받지 않을 자가 있을 수 없고 그 율법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기면 가차없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되는 율법은 시내산에 드러난 하나님의 현현처럼 두렵고 지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주의에 깊이 사로 잡혀 행위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그것으로 다른 지체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스스로 우월주의에 도취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정말 율법과 복음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거울일 뿐입니다.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알 때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고 부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조금 더 믿음이 자라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하게 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토록 오래 교회를 다니면서도 언제나 지체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며 정죄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는 무지와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나 죄 지은 자들을 멸하지 않으시며 율법을 범하고 그 율법을 지킬 능력조차 전무한 인간들을 버리기로 마음먹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그 죄에 대한 진노를 다 쏟아 붓는 대신 다시 살 길을, 죄인들을 영원히 구원할 방법을 찾으셨다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이 구원의 경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숱한 넘어짐을 통해서 인간의 완전한 타락과 부패,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의 인간은 이처럼 결코 그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언제나 넘어지고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감히 하나님께 다가올 수 없는, 감히 그 율법의 근처에도 결코 이를 수 없는, 그들이 바로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습과 그 신앙의 동기가 지극히 가볍고 그토록 자발적이지 않은 이유와 그리고 언제나 신앙이 율법에 사로잡혀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는 차가운 경직성을 보이게 되는 이유는, 이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과 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루신 그리스도의 그 대속하심의 의미와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위대한 구원의 의미를 가슴으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만 있고 복음이 그 심령 속에 없든지, 율법은 없고 쉬운 구원으로 인한 거짓된 복음만 있든지, 그렇게 되면 신앙은 기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현현 앞에 결코 나아갈 수 없듯이 우리가 구약의 율법 아래, 옛 언약 아래 있었던 자들이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그야말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중압감과 두려움과 죄책감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만약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 있었다면 그것을 대단한 우리의 의와 자랑으로 여기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높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모두 죄인이라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확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율법 아래애서 하나님 앞으로 감히 나아갈 수 없는 비천한 존재가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시내산에 현현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그리고 나팔소리와 우렁찬 음성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아마도 두려움과 공포에 질식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사랑받음도 기쁨도 아닙니다. 율법 아래서의 두려움입니다. 죄의 발견이오. 그로 인한 옛사람의 완전한 죽음입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죄지은 자를 그 자리에서 죽이시는 두려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올바로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복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이제부터 모든 것은 다 잘 되게 되어있다는 사탕발림으로 많은 영혼들이 회심을 경험하지도 않은 채 신앙 안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듭니다. 이것은 분명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리 안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는 올바른 믿음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런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는 참 믿음과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