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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 토막 423 (갈 3:21-27)

2023.10.30 08:29

hc 조회 수:845

<묵상, 설교 한 토막>

 

오늘의 성경 분문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종교개혁의 신학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연인들은 인간이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해 버린 죄인이라는 사실과 결코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성경의 정의와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이 절대적인 진리를 결코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졌다 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인 선을 행함으로서,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는 것으로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착각과 논리에 빠지게 되는 많은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차라리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떤 간절한 신앙의 행위나 공로, 의로운 삶과 물질적인 대가가 요구된다고 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에 열정적으로 반응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이러한 인간의 모든 노력들이 결코 인간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지극히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믿는 그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의 진리가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에 무엇인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를 추가해서 더욱 보강하고 싶어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영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사도 바울은 율법과 은혜의 복음과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긴 논리를 통해서 반박하고 재차 강조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이 능히 영혼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의는 반드시 율법을 지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영혼들을 율법 아래, 즉 죄 아래 의도적으로 가두어 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기까지 모두 죄 아래서, 율법의 정죄 아래 거할 수밖에 없도록 정하셨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신칭의의 새 언약 아래에서만 마침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얻게 하도록 섭리하셨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믿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를 짓누르고 얽매는 도구이며 복음이 전해지기 전까지 우리를 가두는 수단일 뿐임을 갈라디아서는 정확히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기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되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는 이 복된 복음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끌어 오게 되는 몽학 선생일 따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몽학 선생은 정규 교사와는 의미와 다른 개념입니다. 몽학 선생이란 헬라 시대에 주인의 자녀가 6~7세가 된 시기로부터 보통 12살이나 혹은 16살 정도가 될 때까지 일상적인 시중을 들면서 학교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며 주인의 자녀를 위해 후견인의 책임을 맡았던 노예를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용어를 율법에 적용해서 율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그 앞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초보적인 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설명했습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이제 그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자들은 더 이상 몽학 선생의 역할을 수행했던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영원히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갈라디아서는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율법 아래로 되돌아가 율법의 종의 멍에를 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새 언약의 복된 약속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그들의 오랜 관습은 그들의 신앙에까지 영향을 미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조건을 달기를 좋아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맞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하고 모든 하나님의 법과 규례들과 모든 율법들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고 싶어했던 유혹을 쉬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행해야 하며 그것을 행하는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스스로를 자랑하고 그것에서 자부심을 얻고자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유대주의자들을 미워하시며 그들을 향해서 날선 비판을 하신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그들의 교만과 율법주의 뒤에 감추어진 인본주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는 곳에, 자기가 나타나는 일에는 그토록 열심을 냈지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주의 말씀에 대해서는 결코 쉬 마음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았던 그들의 모순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외하고 사랑하는 일과 복음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참된 자유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신앙을 빙자하여 인간이 가진 인간 스스로를 끊임없이 높이고자 하는 그릇된 욕망에서 비롯되었던 것일 뿐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사라진 교회는 결국 인간들이 스스로를 높이는 장이 되어 버리고 자기를 숭배하는 우상의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미명 하에 결국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일에 집요한 열심을 드러내는 추악한 사교로 전락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