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3 08:21
하나님께서 쓰신 메시지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라고 다니엘은 설명합니다. 직역하면, ‘세었다 세었다 달아보았다 나뉘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벨사살과 바벨론의 남은 날들을 세셨고 그것을 끝마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벨사살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 나라가 세워지고 망하게 되는 모든 때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이제 하나님께서 벨사살의 때에 이제 더 이상 바벨론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아시고 바벨론의 모든 날들의 종말을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시대가 이제 다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와 역사와 흥망을 결정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그 누구도 자기의 죽는 날을 임의로 바꿀 수 없고 그 어떤 유능한 정치 지도자라 하더라도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흥하게 하시면 흥하게 되는 것이고 이제 쇠하고 망하게 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도 하나님께서 정하시지만 우리의 호흡이 끝나는 날도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는 풀잎에 잠시 맺혔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고 한 국가와 민족의 존재 또한 쉬 타올랐다 꺼져 버리는 장작과 같을 따름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창조자 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겸손히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명령과 계명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이 그 존재의 이유와 목적인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람같이 지나가는 인생 속에서 여러분을 무엇을 깨닫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 있는 것이라 여기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모든 날들을 주관하시며 그 각자의 날들을 세고 계시고 하나님의 주관과 섭리 속에서 그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당신의 인생을, 이 세상에서의 모든 시간을 통치하시고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날들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도 되는, 그토록 오랜 시간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그렇게 우습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반드시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부디 그때 여러분 모두가 참 믿음과 참 구원에 이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뜻을 세워 하나님을 신앙하며 참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왕이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보였다고 다니엘을 설명합니다. 함량이 미달이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자 지극히 가벼운 매우 부족한 자로 벨사살의 가치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더 이상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새털처럼 가벼운 인생, 그가 바로 벨사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본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가 나올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과연 오늘까지의 하나님을 신앙한 나의 모든 신앙과 삶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았을 때 어떤 판단을 받게 될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족함이 보였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모든 면에 있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토록 많은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렇게 회개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보였다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청교도들이 회심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유사 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그리스도인처럼 신자처럼 보이지만 결코 신자가 아닌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믿지 않는 자의 죽음은 그들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부족함을 보였고 이제 더 이상의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 그들에게 남겨져 있지 않게 되는 바로 그 시점입니다. 더 기회를 주어도 결코 돌아오지 않을 자라는 하나님의 뜻이 그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시간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으로 결국 어느 날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신자들의 죽음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히브리 저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인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때가 오래므로.’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이제 이 무렵에는’, ‘이쯤 되었으면’ 이런 뜻입니다. 히브리 유대인들에게 저자는 말합니다. ‘이 정도로 복음을 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웠고 이만큼 시간이 지났다면 그대들이 이제는 마땅히 선생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예수를 믿었다면, 이 정도 교회를 다녔다면, 이 정도로 진리를 배웠다면.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그 믿음이 자라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을 얻는 원리들에 대해서 그토록 많이 들었고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진리의 도, 구원의 도를 무시하고 그 높아진 마음을 낮추지 않으며 진리를 알고자 하는 어떤 마음도 없는 단단한 돌 같은 심령으로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았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매우 부족한 상태에, 그 저급한 수준에, 여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며 신앙과 세상 사이를 오가는 그 위급한 지경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실지를 부디 생각해 보십시오.
벨사살은 하나님의 저울에서 전혀 무게가 달려지지 않는 인생을 산 자였습니다. 율법의 저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 지엄한 율법의 잣대와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측정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함량과 중량은 어느 정도일까요.. 우리는 분명히 율법을 지켜 행한 그 행위의 무게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결코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믿음의 함량은 진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을 만큼의 그 믿음인지를 또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도 역시 우리의 저울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누가 되었든 그가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나의 저울로 내가 판단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정도면 잘 살았어, 이 정도로 믿었으면 됐어..’ 그러나 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저울,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이 참된 가치로 증명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울은 정확한 측량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위한 도구입니다. 정확하게 눈금으로 수치로 그 무게가 공개됩니다. 신앙을 저울로 달아 그 순도를 측정 받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하고 그리스도의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힘써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신앙의 무게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물방울처럼 가볍기 이를 데 없는 신앙이라면 참된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볼 수 있는 그 열매에 결코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