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6 08:35
예수님께서 이들의 무례한 행위 속에서도 중요하게 보신 한 가지는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메시야께서 그것을 믿음으로 여겨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보여지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지극히 무례한 행동조차도 용납해 주시는 그것이 바로 죄인들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입니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의 뺨을 후려치거나 쓰고 있는 안경을 손으로 잡아 벗겨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직 어린 손자에게 결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예의 없고 버릇없는 행동이라도 그 행동이 귀엽고 이쁘기만 합니다. 그것은 손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직 어린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손자의 무례함보다 할아버지의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다른 행위를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오직 그들의 믿음 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많으신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의지이셨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그들의 믿음, 그것에 주목하셨습니다. 그것을 더 귀하게 여겨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서 다른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당신 안에 있는 믿음, 주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에 주목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믿음이 아직은 보잘 것 없고 미완의 것이지만 그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나아가실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에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반드시 진정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매고 온 중풍병자를 예수께서 반드시 고쳐 주실 것을 그들은 믿었습니다. 오직 그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그들은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진 믿음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온전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이미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증거를 보고 들었습니다. 그가 많은 환자를 고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이러한 그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보편적인 믿음의 범주를 넘지 못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히브리서 11장 1절이 말씀하고 있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믿음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실 보편적인 믿음이라고 말할 때 그 믿음은 막연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몸이 아파서 병원을 가게 됩니다.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병이 깊으면 수술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믿고 그 병원에 그 의사에게 우리의 몸을 맡깁니까.. 이 병원의 의사가 명의라는 정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의사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고쳤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그 병원을 찾았고 그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 것입니다. 이 역시 믿음입니다.
우리가 지나가다가 아무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것 역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 한 일입니다. 그 식당에서 오늘 나오는 음식에 독을 탔는지 그 식당의 위생상태가 어떤지, 그 식당의 요리사의 인격이 어떤지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그 집에서 밥을 사 먹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믿고 그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먹습니다. 이 또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확률을 믿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일어날 일이 희박한 확률을 근거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중풍병자를 매고 예수께 나아온 자들의 믿음은 진실로 주께서 인정하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 만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석하고 싶은 데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으려 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행위 속에서 어떤 위대함을 찾고 싶어 합니다. 과연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실 만한 것이 있을까요..
그들의 믿음은 사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간주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이 같은 철없는 막무가내 식의 행위는 사실 믿음이라 여겨질 수 없는 기복적인 마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 본문 속에서 그들의 그 간절한 행위를 믿음으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결코 의롭지 않은 자들을 의롭다 칭하여 주심처럼,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아직 아니었으며 단지 모든 병을 고치시는 주님께로 나아와서 지금 당장 지붕을 뜯어서라도 자신들의 친구를 내려 보내 병이 낫기만을 생각하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기적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날 그 방 안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바가 아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이지만 그들을 불러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이 하나님의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며 긍휼이고 자비하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여겨 주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입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이제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바른 믿음과 성숙한 믿음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신앙이 형식적이거나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열렬함으로 하나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가르치심이 남다르다는 것은 다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주님을 자신의 죄를 대신하실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믿은 자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탁월하고 성경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은 모두가 압니다. 설교와 교리가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먼저는 철저하게 우리 자신이 먼저 진리 앞에 깨어지고 무너지며 통회함으로 그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의 길은 기쁘고 감격적이며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옳다고만 여기고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처럼 우리가 믿는 진리가 옳다는 것 만을 지식적으로 알뿐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가 되지 못하면, 율법을 지키기에 힘쓰고 계명과 법에 순종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복종시킴으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머리만 바뀌어서는 안 되고 이 가슴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깨뜨리기는 자기를 바꾸기는 여전히 싫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리의 엄격한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좇아가는 일에는 여전히 부담을 느낍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는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피상적인 믿음, 막연한 믿음 관념적임 믿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도 이 무더운 날씨에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되심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중 여러분,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그분이 바로 나의 구주이심을 믿고 고백하게 되어야 합니다. 죄 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이 반드시 여러분의 영혼을 관통하는 생애적인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의 모든 필요를 해결해 주고 모든 문제를 종결시켜 주실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회개의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본인들의 죄를 깨달아 참회하는 것은 관심이 없고 온통 다른 것에만, 현실적인 문제에만 언제나 집착하는 신앙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