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3 08:47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다시 가버나움 동네로 들어가시다가 레위를 보게 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는 레위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과 오늘이 그가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길로 행하신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 그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든,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악한 인생을 살았던 자이든지 주께 그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그날 그곳에 있다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주의 부르심을 입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이 절대로 상종하지 않는 혐오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출입이 금지되었고 법정에서 증언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만큼 부정한 자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살인자와 강도보다 더 악한 자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로부터 세금 징수 업무를 청부 받은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고리대금이나 이자를 통해서 착취를 일삼았으며 로마의 국고로 환수하는 금액을 제외한 모든 돈을 착복해서 많은 부를 누리던 자들이었습니다. 레위는 세관의 업무를 행하는 자로 판매세, 관세, 무역세, 등의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행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그는 그날도 세관의 자리에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을 증오하고 미워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레위를 주님은 보셨습니다. ‘보시고’라고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 주께서 그를 주의 깊게 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로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주목하셔서 특별하게 지켜보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많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주께서 주목하신 자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를 오늘도 하나님은 주목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야 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목해서 보셨던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부르심을 받게 되었고 지금 이 자리에 나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들을,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사람을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모두가 싫어하는 자들, 기독교의 복음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까지 찾아가는 것입니다. 레위가 선하고 정직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할 만큼 그가 하는 일은 악한 일이었고 그는 황금을 숭배하며 동족들의 피를 빨고 있었던 악인이었습니다. 개보다 못한 인간으로 여겨지던 자에게 주님은 다가오셔서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며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행위와 삶을 보시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서 우리를 자녀로 불러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해 주실 만한 어떤 공로나 자격이 있는 자를 구원해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죄인들을, 악인들을, 예수를 거부하고 멸시하며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을 높이며 살아가던 추악한 자들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셨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가 받은 은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선택과 결과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과 의지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여전히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의 결과라고 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근본적으로 신앙의 마음자세가 바뀌게 됩니다. 내가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문제는 자율적으로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적인 신앙의 태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모든 거듭난 죄인들의 공통점은 자신은 모두 아무런 소망이 없는 죄인이며, 심지어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신을 여기는 자들입니다. 나에게 임한 이 모든 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밖에 없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철저하게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정직한 자기 인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한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아직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뿐입니다. 도저히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자격도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주께서 손을 내밀어 주심으로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주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런 것인지를 확인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