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7 09:25
교회를 다닐 수는 있지만 십자가 아래서 자신의 실존을 정직하게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 대한 아무런 감격도 감사도 없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그 은혜에 대한 진실되고 생애적인 고마움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는 것과 택하심을 입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알아야 구원의 의미를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우리는 깊이 이 주제를 생각해 보아야 만합니다. 세리를 제자로 삼으신 주님, 이는 유대사회에 충격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어 합니다. 뛰어난 자를 자신의 제자로 삼아 그를 가르치고 지도하고 싶어 합니다. 보편적으로 사회적인 지위나 지적인 수준, 물질적인 여유로움 등의 형편이나 조건들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관계를 형성하기를 좋아합니다. 관계를 맺음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고 충족이 되는 부분이 있을 때 그 관계를 더 깊이 발전시키려 하고 그 관계를 잘 유지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있던 악명 높은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고자 하시는 이 장면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많고 많은 사람들과 직업 가운데 유대 사회에서 가장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직업의 사람을 주께서 제자로 부르신 것일까요.. 복음은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어떤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어떤 피부색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주님은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는 분 이심을 주께서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이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지만 복음은 모든 자들을 위한 것임을 주께서는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조건을 보지만 주께서는 결코 우리와 같지 않으심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택하신 자를 자녀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의 택하심일 뿐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조건이나 공로나 노력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과 선입견이 어떻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복음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같은 사람이 이 자리에 나아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준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의사인 누가를 부르셨지만 극혐의 직업인 세리였던 마태, 레위도 부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누구도 구원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예수를 믿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런 인생을 살아온 자는 결코 예수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역사 속에서 적그리스도적인 세속의 사악한 독재자들과 권력가들에게까지 복음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축에 서 있는 자들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오늘도 죄악된 길로 걸어가는 이들 가운데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격이 있었기에, 구원을 얻을 남다른 조건을 갖추었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믿으십니까..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탁월한 것이 있어 개혁파 신앙의 후예들이 되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 예수 밖에서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믿지 않고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는 있었지만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믿음에 관해 여전히 무지한 채 그렇게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이고 현세 기복적인, 혹은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나 중심의 나 자신만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이기적인 신앙과 오만무례하기 그지없는 삶을 무지 속에서 내 마음대로 살아왔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의 어떤 모습도 주께서 인정하실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라 여기며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중심이었던 그런 그릇된 믿음의 길을 가던 자들일 따름이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참된 진리 안으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바른 신학과 교리를 통해서 분별력을 갖게 하셨고 무엇이 진정으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보고 듣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인지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성경의 올바른 지식과 참된 믿음 안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참된 신앙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기복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붙들던 천박하고 어리석은 믿음 가운데 있던 우리를 참 진리와 구원 앞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자기 안에 아무런 희망도, 어떤 소망도 보이지 않던 자를 주님은 오늘도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예수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가던 우리들을 믿음 안으로 예수 앞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일방적인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갚을 길이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부디 이 말씀을 듣는 당신에게 이 진리가 깨달아지기를 소망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가운데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을 뿐인데 성도가 어떻게 다른 성도를 비난하고 그의 영혼을 평가하고 저울질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안에 어떤 선한 것이 있어서 타인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구원은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는 자에게, 그런 은혜를 부어 주신 자에게 임합니다. 모두를 구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시인하고 인정하는 자라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으로 부르실 자들을 먼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낮추시는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온 모든 삶이 쓰레기와 같은 시간들이었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자복하게 하십니다.
신앙은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처럼 보이지만 신앙이 아닌 것은 여전히 자기를 높이고 자신을 인정받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고 충성을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일 수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여러 가지 그릇된 동기와 이유와 목적으로 종교생활에 심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형태의 그릇된 신앙입니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인가 모두 들통나게 되고 무너져 버리고 말게 되는, 믿음처럼 보이나 믿음이 아닌 유사 믿음일 뿐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모든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길과 무관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하고 파산 선고를 내린 사람, 자신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철저하게 시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만을 바라는 자라야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