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0 08:23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마음을 다해 믿고 있지 않다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정말 주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요한의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영적인 까막눈이고 귀머거리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분명 요한을 통해 메시야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간절한 금식의 이유에는 분명 이러한 거룩한 목적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셨지만 그리스도의 도를 배우기를 원하기보다는 나름대로의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신앙의 형식을 고수하며 도리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그들도 금식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유대교적인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전혀 형식적인 무의미한 금식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은 나름대로의 경건의 훈련을 금식을 통해 행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은 전혀 금식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즉시 이 문제를 예수께 따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일행은 지금 레위의 집에서 만찬을 나누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지금 전통을 지키며 금식을 하고 있는데 먹고 마시고 있는 예수의 제자들을 보면서 요한의 제자들이 얼마나 그 마음에 그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싶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인가 내가 지금 매우 가치 있는 것을 올바로 여기고 그것을 굳게 지키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 자들을 볼 때 우리의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우리도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제자와 같은 동일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저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한 것조차 간과하고 지켜 행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고 저들의 신앙은 저급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의가 드러나는 일, 우리의 공로와 업적이 나타나는 일에 대해서 가장 높은 관심과 그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됩니다. 그 가치를 대단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반감과 적대감, 멸시하는 마음과 부정하는 마음의 철갑을 두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바른 진리 밖에서 무지하고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던 자들이었고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았던 자들이었음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쉬 다른 지체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빠지기 쉬운 교만과 아집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지식뿐만 아니라 그 지식의 본체 이신 그리스도께로 더 깊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지식의 주변에만 머물게 되면 바로 요한의 제자들이 보여준 이 같은 어리석음과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모든 것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고 그 가치는 지키지 않는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로 자기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로 평가절하하고 무시하게 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 그 모습만 가지고 그들을 속단하고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더욱 정당화하게 됩니다. 바로 요한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옳고 당신들이 틀렸다고 고집하는 매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자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가 맞고 저들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독선에 갇히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게 되고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정말 내가 옳고 다른 사람들이 틀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전히 우리 중심적인 생각과 아집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고 그 벽 안에 갇혀서 그릇된 자기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사를 하며 교제를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교적인 전통인 금식은 전혀 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떤 가치나 지식이나 행위가 나 자신을 드러내는 근거가 될 때, 그 모든 것이 무시되는 것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무시되었다고 여기는 피해망상 혹은 피해의식일 뿐입니다. 자기들이 정한, 자기들의 의와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서 요한의 제자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결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주께서 모두 은밀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신 세 가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언제나 드러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일종의 과시용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항상 그것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게 되어 있습니다. 드러나는 것을 좋아할 뿐 은밀히 행하는 것을 진정으로 감사하며 묵묵히 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나를 드러내고 인정을 받기 위함 일뿐입니다. 여러분이 주를 위해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행하는 것이든지 그것이 당신의 자랑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행하지 않는 자보다 당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근거가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