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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들 눈에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이 손 마른 자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들은 예수께서 이번에도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는 모습을 보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만약 이 환자를 고치기만 하면 당장에 그를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를 들어 고소할 기세였습니다. 이러한 사악한 무리들 앞에서 주님은 정면으로 그들에게 도전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12 10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바리새인들은 침묵을 깨고 예수께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구조차도 하지 않으시고 이어 마태복음 12 11, 12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다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주님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는 것은 괜찮고 오랫동안 질병에 고통 당한 이 사람을 고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일, 이곳에 있는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생애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시고 구원과 영생의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마음은 율법을 준수했느냐 준수하지 않았느냐의 문제 보다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가 그 모든 죄악의 사슬에서 놓임을 받아 해방되는 것에 있었습니다. 모든 논쟁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영혼이 회심을 경험하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에 대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했던 영혼이 주를 만나 진정한 기쁨과 영혼의 회복을 경험하는 것에 있습니다. 내세를 바라보며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을 넉넉히 감당할 힘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형식적으로 지켰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대로 지킨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경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1 11~1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 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6 6~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구약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께서 이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식적인 예배에 대해서 강하게 거부하시며 질타하시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만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를 형식적인 것으로 변질 시켰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연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신앙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고집스럽게 사랑하는 자들은 결코 주님을 교회와 지체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럴 마음도 없고 그럴 의지나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진지하고 뜨겁게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만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열정적이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믿음으로 치열하게 사는 것만큼 하나님을 진지하게 신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를 사랑하는 자라야 주일을 온 마음을 다해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진리를 깨달으며 성도의 깊은 사랑의 교제와 교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공허할 따름입니다. 그에게 어떤 기쁨과 영혼의 희열도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결국 바른 믿음의 자리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 계명과 율법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위선적이고 가식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안식일의 수호자라도 되는 양, 자신들이 만든 규례와 전통들을 붙들고 그것으로 영혼들에게 참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도모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주께서 보실 때 저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증했겠습니까.. 오직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그들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들이 만든 규례를 자신들과 동일시하며 누구든 이것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그들의 치졸한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기 사랑을 버리지 못한 채로 오늘도 엉뚱한 트집을 잡으면서 자신들의 존재감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이런 유의 신앙은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사게 될 뿐인 가식적인 거짓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진리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로부터 멀어져 있는 영혼이 가장 불쌍한 영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형적인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분노하게 하는 그릇된 신앙의 행태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품은 그 완악하고 무지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두 가지 감정과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하나는 근심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노하신 것입니다. ‘근심하사’라고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 슬프게 하다, 괴롭히다라는 의미로 주님께서 슬퍼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무지와 완고함에 대해서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율법의 의미를, 안식일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저들의 무지함에 대해서 주님은 먼저 측은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인간의 무지함과 그 완악한 고집스러움에 대해서 주님은 애끓는 마음으로 슬퍼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다른 주님의 감정은 바로 분노이셨습니다. 슬픔의 가정과 함께 주님은 극렬히 분노하셨습니다. ‘노하심으로라고 번역된 의미는 매우 분노하심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심은 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분노하신 것으로 짐작되는 상황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때 상을 엎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사람들과 가축들을 성전에서 모두 내어 쫓으시던 때였습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서 분노하셨다는 기록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 분노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죄인들을 향한 자비와 긍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이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은 슬픔과 분노, 이 두 가지 마음이십니다. 진리를 참된 복음을 깨닫지 못하여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 대한 깊은 슬픔과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며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고 있는 교만하고 완고함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주님은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수없이 듣고 있음에도 여전히 참된 믿음의 자리로 나아오지 않는다면 당신을 향해서도 그 영혼의 비참함에 대해서 주님은 한없이 슬퍼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또 한편으로 수많은 말씀의 초청과 지엄한 경고를 듣고도 여전히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당신을 향해서 주님은 분노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모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 슬퍼하며 애통하는 마음과 그들을 그렇게 불신과 교만 속에 붙들어 놓고 있는 죄악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완고함 속에 있는 영혼들을 향한 슬픔과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영적인 싸움을 싸워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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