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9 07:45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동기와 목적은 결코 주와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부르심이 있어 제자들이 되었지만 그들은 전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원석 같은 모습의 제자들의 미래를 보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사도로 그 사명을 다하게 될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실수투성이의 제자들이지만 그들이 성령에 붙들릴 때 얼마나 위대한 사도들로 훌륭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도 그렇게 일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좇았다고 말할 때만 해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당연히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를 이 땅에서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곧 일어나게 될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번번이 외면해 왔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믿음을, 성경이 말씀하는 이 분명한 진리를 외면하려 하지 않으십니까.. 주님과 함께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보다는 그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많은 가치들에 대해서만 더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아니십니까..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에 이러한 말씀은 언제나 무시되기 십상입니다.
항상 예수님이 수족처럼 데리고 다니신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도 결코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 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어릴 때로부터 구약의 말씀을 잘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금까지 알아온 모든 구약의 말씀과 율법 속에서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배웠던 것일까요.. 언제나 정치적인 메시야에 대해서만 기대하고 바라왔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출세를 하고 싶은 마음의 집착을 쉬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신앙의 처음부터 기복주의의 복음을 들어왔다면 그것에 대한 미련을 쉬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를 믿음의 대가를 현세 기복과 물질적인 보상의 논리로 이해하게 되면 언제나 신앙의 동기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형통하기를 바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3년이나 따라다니며 복음을 들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 관해서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무지하면 평생을 교회를 다녀도 이 현세 기복주의와 자기 행복, 긍정주의의 거짓 복음과 그릇된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자기 부인은 이 땅에서 자신의 높아짐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더욱 낮아지는 것, 그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은 언제나 자신만을 가장 사랑하고 자기가 가장 높아지려는 자신을 죽이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타인에 대한 정죄와 비난과 판단을 버리고 오늘도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나 자신을 내려놓는 긴 싸움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바로 그러한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치열한 자기 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영혼은 은혜의 문이 막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교회는 늘 갈등과 분열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될 것을 주께서는 아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우리들에게 이것을 교훈하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 속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형제였으며 세베대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항상 최측근에서 예수님을 보필하며 제자들 중에 제자들로 주님과 매우 친밀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해서 믿음이 제일 강하고 가장 주님을 잘 아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