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0 08:06
그들은 주님과 각별한 친밀함을 앞세워, 그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무엇인가 특별한 부탁을 주님께 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그들의 어머니까지 이 일을 위해 등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그녀는 이후에 십자가에 달리시던 주님을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과 끝까지 따랐던 여인들 중에 포함된 여인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녀를 세베대의 어머니로, 마가복음에는 살로메로,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이모로 각각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요한과 야고보는 사실 이종 사촌지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인척 관계를 이용해서 어머니를 앞세워 예수님께 지금 중요하고 높은 자리를 청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과 그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마치 어린아이같이 자기들의 바라는 바를 부끄러움 없이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메시야의 이 땅에 오심의 그 목적과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 어리석은 처사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얻고자 하는 경우들입니다. 그것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하나님께 구해 보자는 식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어처구니없는 요청에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물어보십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가 말합니다.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한마디로 인사 청탁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계속 지적해 온 바대로 이들의 예수를 따르는 이유와 목적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유대주의의 그릇된 성경 해석으로 인한 영향으로 이 같은 기복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올바로,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을 때의 신앙이 이와 결코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었던 제자들은 이후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 성령을 받고 사도가 되어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전하다가 대부분이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제자들처럼 처음에는 우리도 무지하고 예수를 믿는 동기와 목적이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어도 우리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지향하고 거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은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목적을 지향하도록 우리를 깨우치시고 다듬어 가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도 이 자리에서 여러분은 바로 이 복음을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디 어리석은 그릇된 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믿음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늘 제자들에게 섬김과 낮아짐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주님의 마지막 교훈도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것을 깊이 그들의 마음속에 각인하신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 땅에서 높임을 받을 것을 말씀하거나 약속하신 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주의에 깊이 물든 그들의 사고는 언제나 예수를 좇음으로 그들이 이 땅에서 잘되고 출세를 하게 되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에서 이 무지하고 어린아이 같은 단계를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그릇된 신앙의 동기와 목적에서 이제는 돌이켜 진리가 말씀하고 있는바 영원한 삶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더욱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본연의 구원의 목적을 힘 있게 지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주가 원하시는 겸손한 믿음입니까.. 지식의 우월함을 앞세워 다른 지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까.. 신앙은 자신의 낮아짐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그 영혼이 그리스도를 닮아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내 자신이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지식적으로만 자라게 되면 반드시 기형적인 믿음에 빠지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언제나 외톨이가 되어서 늘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개혁주의를 지식으로만 이해한 나머지 교회와 지체들을 쉬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는 그릇된 신앙은 결국 자기 자신도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하지 못하는 모순된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제자들은 낮아짐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높아지는 것에만 그들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내가 이 세상에서 더 높아지는 것에만, 더 잘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결코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믿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셨고 우리가 무엇을 알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한 번뿐인 삶을 그 하나님의 뜻 위에 포개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서 빛나시도록,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시도록 하는 것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그 삶의 목표를 지향하며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간 인생들에게 주어지는 궁극의 축복입니다. 낮은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던 중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생각지 못하게 우리를 높이실 수 있고 우리에게 형통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우리가 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충성하도록 지체들을 잘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그것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 신앙의 궁극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량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 더 많은 것을 얻고 누리고 받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동기라면 그는 신앙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야망은 자기들과 함께 예수의 뒤를 좇았던 다른 제자들까지 모두를 자기들의 발밑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주님을 좇은 목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한 마음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 신앙의 목적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유치한 신앙의 이유입니까..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 복을 받고 형통하고 잘 살고 싶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이유와 목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빗나간 욕망일 따름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인간의 타락하고 부패한 탐욕일 뿐입니다.
제자들이 진리를 전혀 알지 못했듯이 오늘도 많은 교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구원으로 불러주셨는지를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세기복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진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가져온 궁극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모든 그릇된 수단과 방법조차도 정당화하는 어리석은 죄가 버젓이 신자 안에서조차도 합리화되고 있는 근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