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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는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을 때 이것을 책망한 자들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마태는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요한은 그 가운데서 이 말을 처음 한 이가 바로 예수님의 무리들 중에 회계를 맡고 있었던 가룟 유다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재물에 언제나 탐욕이 많았던 유다가 가장 먼저 이 여인을 향해 분노하며 비난했고 다음으로 제자들이 이에 동조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분노하다라는 단어가 현재 능동태 분사형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분노의 감정을 품고 계속해서 그녀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그 돈을 팔아서 예수님께 드렸다면 그 돈을 자신이 착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회계를 맡으면서 항상 그렇게 몰래 돈을 훔치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 4~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유다는 원래 도둑질을 즐겨 하던 자였습니다. 공금을 언제나 슬쩍 빼돌리는 일에 능했던 자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유기된 자였기에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의 이 같은 분노와 비난의 모습이 이해가 되십니까.. 다른 이들도 아니고 예수의 제자들이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께 행한 이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분노하며 비난하고 있었다는 것이 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의 제자들은 어리석고 생각이 짧은 자들이었으며 그들 중에 누구도 마리아처럼 죽음을 앞두신 그리스도에게 간절한 사랑과 존경과 슬픔의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은 할 수 없는 이 일을 그녀가 예수님께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질투의 마음을 분노와 비난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항상 자신이 할 수 없는 헌신을 누군가가 하게 되면 그것을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고 칭송하기보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며 비아냥거리고 못마땅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가치 있는 일을 누군가가 하게 될 때 그것을 평가 절하하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것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싶어 하는 악한 마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분노하며 마리아를 비난하는 논리를 보십시오. 이 고가의 향유를 차라리 삼백 데나리온에 팔면 가난한 많은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것을 이렇게 낭비했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임금 정도가 되기 때문에 일 년 연봉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하루 임금을 지금처럼 약 10만 원 정도로 계산하며 삼천만원 정도가 되는 금액이기 때문에 옥합의 가치는 대단히 고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그들이 그렇게 성숙한 자들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투던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헌신을 한마디로 허비라는 한마디의 단어로 평가절하했습니다. 허비가 아닌 사랑도 있습니까.. 사랑의 속성은 결코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정신은 무조건적인 낭비, 그리고 희생입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나는 무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내 것도 챙기고 이웃의 것도 챙기는 것은 이웃에게 조금의 친절을 베푼 것일 뿐 내 몸처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무의 상태가 되고 그가 유의 상태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숭고한 허비입니다.

 

사랑은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남겨두고 자기의 것을 먼저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필요를 보았을 때 나의 모든 것으로 그의 필요를 채워주고 자 함이 사랑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 주고 못다 준 것만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비입니다. 당사자들이 아닐 때 그 사랑의 모든 행위는 허비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를 볼 때 저들은 자기들의 한 번뿐인 인생을, 귀한 물질을, 저들의 몸을 허비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지금 주님을 올바르게 섬기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전혀 낭비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자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지금의 아내나 남편을 합리적으로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랑했다면 우리는 결코 결혼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철저하게 계산된 사랑을 하는 자와 결혼을 할 자가 있겠습니까.. 허비와 같은 간절함으로 열렬하게 사랑했고 그 사랑을 고백했으며 표현했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졌기에 결혼을 했고 부부가 된 것 아닙니까..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자신의 인생과 삶을 고통으로 그을리면서 자녀를 키워내는 것이 숭고한 허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지극한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모든 과정을 지나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극한의 고통과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보이신 그 모든 사랑이 허비가 아니라고 말할 자 있습니까..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이시니까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서 당연히 그 정도의 대가는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시겠습니까.. 전혀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는 허비와 낭비 같은 사랑을 주님은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같은 사랑을 받은 오늘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 같은 자를 위해서 그러한 사랑을 베풀어 주심이 낭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위대한 허비입니다. 사랑하기에 낭비처럼, 헛된 일처럼 보이는 그 길을 기꺼이 기쁨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타인이 볼 때 허비 같은 무가치한 일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행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일을 그 행하는 대상을 매우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일찍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매일 아들의 무덤을 찾는 한 어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잊을 길이 없는 사랑이 시키는 허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주님께 드리는 시간, 물질, 몸이 아프고 불편해도 주일에 교회로 향하는 그 곧은 발걸음, 주일마다 그 먼 거리를 달려 이곳으로 나아 오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이 모든 것이 타인들이 보기에 허비로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허비하셨기에 우리 또한 기꺼이 주님을 위해 거룩한 허비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혀를 차면서 한심하게 우리를 바라볼 것입니다. 인생을 낭비하는 자들이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자들이고.. 저들에게 준 물질을, 자신들의 몸을 돌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합리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적당히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받은 만큼만 주는 이해타산적인 사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복음보다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십자가와 그 처참한 죽으심보다도 이러한 세상과 인간을 향한 가치를 더 높이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 가운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지켜야 할 소중한 복음의 가치들은 모두 뒤로하고 다른 가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자들을 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더욱 소리 높여 외치고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와 무능에 대해서 이 세상의 소망 없음을 더욱 강조하며 모두 예수께 돌아와야 함을 우리는 언제나 외치고 강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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