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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토막115

2022.08.01 07:52

hi8544 조회 수:25

<묵상, 설교 한토막>

예루살렘 성 안으로 백성들을 유입 시켜 그들을 정착 시키기 이전에 이미 지도자들은 스스로 본을 보여 성안에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앞서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될 때 공동체는 힘있게 세워지는 법입니다. 
선한 일에 사람들을 움직이고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이 본을 보이는 일들이 모든 시대마다 반드시 요구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지도자가 사라진 시대는 재앙이 될 것입니다. 모두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게 되는 무질서한 시대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성 안에 살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각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우는 일에 이같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고 그들은 이렇게 솔선수범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이든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말보다 더 큰 행동으로 소리를 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공동체를 이끌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앞선 자들과 그리고 선한 일에 자원하는 자들을 통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는 귀한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이미 예루살렘 성 안에 정착해 있었고 다음으로 성 안에 거주할 백성들을 정하는 일에 제비를 뽑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비를 뽑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결정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잠언 16장 33절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이렇게 항상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느헤미야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는 대적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부흥시키고 각성케 하심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신 이유는 다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지키시는 나라와 백성들의 그 탁월성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다 망한 나라와 민족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때에 그들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신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들의 인생의 의미이며 교회가 모든 악한 시대에 존재하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의 정체성을 고린도후서 6장 7~10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죽은 자들 같으나 다시 살아나는 자들, 모두가 근심하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기뻐하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 같지만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신비한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능력에 붙들려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정체가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에 힘입어 그렇게 모든 역사 속에서 생명의 진리를 지켜낸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였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자들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거 이주해서 강력한 하나님의 도성을 형성해야 할 시대적인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이 완공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 도시가 황폐된 상황이었고 따라서 사실 예루살렘 성은 거주하기에 안전하고 적합하고 쾌적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부흥과 각성을 통해서 영적으로 충만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모든 백성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농지와 소유지를 모두 버리고 생활의 터전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를 결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원해서 이주를 결정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정은 매우 귀한 헌신이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원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제비뽑기를 통해서 이주자들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비뽑기를 통해서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살던 백성들 가운데 십분의 일을 예루살렘으로 이주토록 조치를 하게 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십분의 일의 선택된 자들은 그렇게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원을 했든지, 제비를 뽑아서 결정이 되었든지 예루살렘, 거룩한 성 안에 거주하게 된 것은 분명 특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성전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실상은 반대로 그곳에 살아 가기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꺼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살아가기를 꺼렸던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더 엄격한 생활이 요구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성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스스로 거룩한 삶을 위해 정진하고자 하는 영적인 동기가 부족한 자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사는 것보다 그 밖의 다른 도성에서 그러한 부담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자신들에게 편리할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거주를 기피한 또다른 이유는 그곳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주변에 언제나 이곳을 공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악한 이방의 나라들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으로의 이주를 결정하는 일은 적지 않은 위험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특권에는 언제나 위험과 책임이 따르고 그리고 감당해야 할 부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