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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토막255 (히 6:1-8)

2023.02.21 06:23

hi 조회 수:390

<묵상, 설교 한토막>


성경은 초보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적인 성숙의 단계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의 성장에 관해서 전혀 마음을 두지 않으며 여전히 영적인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고집할 경우, 그러한 신앙의 병적인 유아기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결국 그 끝은 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비췸을 받았다는 의미는 복음의 빛이 그 마음에 속에 비춰짐으로 인해서, 즉 복음을 들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을 뜻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표면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늘의 은사까지 맛보았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존 오웬은 이에 관해서
맛본다는 것은 씹어 삼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소화시키거나 영양을 섭취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맛본다는 것은 그저 잠깐 그 맛과 향을 음미하는 수준을 가리킨다고 주해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어느정도 신앙과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소위 은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 느낌을 아는 정도에 까지는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설교를 들으면서 공감하기도 하고 세례나 성만찬에 참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문화적으로 그 맛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어떤 감동을 맛보기는 했던 수준과 정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자가 일반 세상의 어떤 주제를 논하는 강연을 통해서는 감동을 받지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도 영화를 보던지 드라마를 보던지 책을 읽으면서 영혼의 감동을 받고 나름 일반 은총 속에서 감화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진리와 동일한 가치로 작용하지는 않듯이, 신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교회를 다니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상당 부분 공감을 하거나 감동을 받거나 은혜를 맛볼 수는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에 참예한 바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성령은 마음을 고치고 영혼을 치료하여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같은 성령의 우리의 내면을 만지시는 역사가 비단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종종 그 영혼 가운데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의 발람 선지자나 사울 왕도 놀라운 은사를 받기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나 바울 사도의 동역자 데마도 상당한 신앙의 수준에 도달했던 자들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세 떠나가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절은 이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까지 맛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것은 진리를 통해서 깊은 깨달음까지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성경을 모르는 자가 아니요 올바른 교리나 정통 교리에 대해서 일체 무지한 사람이 아닙니다.
깊이 있는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깨달았고 말씀의 능력까지 경험한 자입니다. 그러한 말씀의 능력을 맛본 자라도 그 가운데 배도할 자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될 내세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소망과 그 능력까지도 알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 정도의 믿음이라면 결코 초보적인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상당한 신앙의 수준에까지 이르러 많은 것들을 신앙 안에서 경험했음을 뜻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거듭난 택자가 아니더라도 성령의 은사와 권능을 소유하고 성령의 진리의 깊은 말씀의 의미와 내세의 소망을 갖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직자 중에서도 그가 진실로 회심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기능적으로 쓰임을 받고 버려지는 경우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일에 참예하고 은사를 발휘한 사람 가운데서 조차도 버려지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는 분명하게 그 특징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성령의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물질에 있어 탐욕적이며 음란하기 까지 한 죄악된 모습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경우입니다.
전혀 그가 거듭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악행을 일삼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가 아무리 어떤 성령의 일처럼 보여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감출 수 없는 극단적인 양면성이 드러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입니다.
 
문제는 한번 비췸을 얻고 은사를 경험하고 성령에 참예하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으며 내세를 소망하고 기대하기까지 했으면서도 타락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타락하다’ 라고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 ‘범죄하다’,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떠나 불신앙의 상태로 떨어져 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신앙을 가졌던 어떠한 징후나 상태를 소유했다 하더라도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배도하여 타락하게 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도록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