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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토막242 (히 4:14-16)

2023.02.01 16:59

hi 조회 수:685

<묵상, 설교 한토막>


히브리서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고난과 핍박과 시련과 질병과 실패와 좌절 등의 여러 어려움 등을 우리가 맞이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경험하시고 아심으로 우리를 도우실 모든 준비가 되어 계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리고 다음으로 그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뢸 것을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담대히 나아가다 라는 말은 ~에게 다가오다, 가까이 접근하다 라는 뜻인데 이 부분이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이 말씀이 유효하며 따라서 우리는 그 도우심을 얻을 수 있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모든 고난과 시련 속에서 웅크리고 있거나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고 또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왜 뒤로 물러가려 하십니까..
우리를 돕기 위해 사망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동정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경험하시기까지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스스로 갖추신 주께서 우리를 위하고 계시는데 왜 그 주님을 모르는 자들처럼 엎드러져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은혜로 특정 지어지는 보좌’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오직 은혜의 보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보좌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그 백성들에게,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신이심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끊이지 않는 은혜의 샘이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영혼 가운데로 흘러 들어가게 하심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나아가야 할 대상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보좌의 왕께서는 언제나 자기의 백성들에게, 죄인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55장 1~3절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부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죄로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들에게, 그들의 영혼이 살 수 있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와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소생함을 입을 수 있는, 하나님의 결코 끊이지 않는 그 은혜의 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그 긍휼을 맛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는 영혼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염려하기 보다는 육체의 빈곤과 궁핍을 더 두려워 하며 살아갑니까..
우리의 진정한 영광과 안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핍박과 환난이 극에 달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궁핍을 당할 때도, 생명을 버려야 하는 박해의 순간에도 담대함과 확신과 기쁨 속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그 신앙의 고백을 지켰던, 그리고 지금도 그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는 믿음의 선조들과 박해를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은혜를 받은 자들임에도 그들이 보여주는 그 믿음의 기백과 우리의 그것은 이처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복음이 다른 것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하나님과 지금은 다른 분이십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의 평안과 번영의 시대가 오늘 우리의 신앙의 야성을 모두 잃어버리게 하고 있음을 분명히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신앙의 정서와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시대를 온 몸으로 감당하며 그 믿음의 고백을 지켜냈던 그들의 믿음과 내용과 질에 있어 너무도 다름을 깨닫습니다.
 
환난과 박해 속에 있던 그리스도인과 그들의 가정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배가 부르고 자유가 넘치기에 일어나는 분쟁과 불평과 갈등들입니다.
믿음 하나 지키기에 급급했던 그 핍박과 박해의 시대에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서를 붙들어 주는 일에 전심을 다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갈등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문제들이 그들에게 사치였을 것이고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믿음을, 신앙의 고백을 지키는 일만을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과 긍휼을 구했을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극에 달하는 박해와 시련과 고난의 때에 그들은 매일 매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만을 눈물로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며 그 핍박을 견디고 승리했는데 
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을 지키십시오, 예배에 빠지지 마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
이런 권면들만이 넘쳐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일까요..
참담한 마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도 견디기 힘든 박해와 핍박을 주셔서 쭉정이들은 다 날아가게 하시고 알곡들 만을 남겨 그 불굴의 믿음과 고백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목사만의 생각일까요..
 
우리는 지금 배가 부른 것입니다..
간절히 그 은혜의 보좌만을 바라볼 절박하고 간절한 이유가 더 이상 우리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의 가정에서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신 모든 성도들의 영적인 피난처 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유와 풍요 속에 영적인 나태가 마음의 강퍅함이 볼러온 일들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그렇게 가볍고 우스운 것입니까..
신앙이 그런 것입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분명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어떤분들은 전혀 절박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은 가운데 미지근한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의 그 왕께서 오늘도 담대히 나아오라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데도 그 모든 하나님의 초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하지 않는 삶과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며 예배와 경건과 멀어진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절박하고 간절한 호소가 영적인 게으름과 방만함으로 늘어질 때로 늘어진 영혼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자기의 쾌락과 즐거움과 자신의 계획만을 따라 하나님을 멸시하며 진리를 우습게 여기며 살아가는 목이 곧은 자들에게 이 생명의 진리의 말씀이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겠습니까..
모두 돼지 목에 진주와 같은 가치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