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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토막246 (히 5:1-10)

2023.02.08 08:06

hi 조회 수:984

<묵상, 설교 한토막>


멜기세덱은 전통적인 유대 개념과 전혀 다른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살렘 왕이며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신비한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의 뜻은 ‘의의 왕’이란 의미이고 ‘살렘 왕’ 이란 ‘평강의 왕’ 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서 보더라도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고 그리스도를 호칭한 것은 멜기세덱은 율법에 따른 제사장이 아니라 원시적인 족장 시대의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하나님께서 지목하신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속박되지 않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란 의미는 율법 아래에 있었던 아론의 후손들로서의 대제사장들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지명하고 선택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메시야 이심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 역시 그리스도의 독보성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직 제사장의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멜기세덱처럼 예수 그리스도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박해와 핍박과 회유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다시 한번 대제사장으로서의 죄인들 위해 감당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사명을 설명함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야 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 자체가 신비요 율법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대속을 이루시기 위한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감당하실 수 있는 사명이라는 사실을 히브리서는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생들에게 구원을 받을 길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사랑이 결국 길을 만들고 굳게 닫힌 구원의 문을 열어 젖혀 하나님과 다시 화해를 이루게 함으로 죄인들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그 방법이 바로 신비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독보적인 대제사장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오게 하신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바로 당신을 향하신 멈출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구원 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 열심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단번에 영원히 속죄의 제사를 완성하실 수 있는 유일한 대제사장이 필요했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어야만 한다는 당위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감당하셨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은혜를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의 말씀은 당대의 히브리인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로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속하신 은혜를 알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는 말씀도,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신 이 말씀도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주 되심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음을 가리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인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 중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아는 것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세밀하게 아는 것을 포함합니다.
 
왜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주저 앉으며 더욱 깊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피상적으로만, 지식으로만 알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철이 들기 전에는 부모가 나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나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에 대한 진정한 감격이나 감사가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의 도리와 그 예절을 배워도 그것은 지식에 머물 뿐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가 나를 낳아 오늘까지 나를 위해 베풀어 주었던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고 고귀한 희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섬김으로 부모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고 감사하며 존경하게 됩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여길 수 있을 때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진실하게 되며 그 사랑에 대해서 이제 마음에서 우러나는 거룩한 책임과 진실된 보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 것인지는 모릅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도 그저 지식으로만 알 뿐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거룩한 희생의 의미도 가슴에 깊이 와 닿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이 아직 우리에게 생길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깊이 느껴지고 절절히 우리의 모든 세포에 각인이 될 때, 우리는 나를 그토록 사랑해 준 그 대상에 대해서 의무가 아는 자원하는 마음, 진실된 마음으로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되고 내게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무엇을 드리든 그것은 전혀 아까운 것이 되지 않는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너는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아들을 너를 위해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너와의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 있는 진실을 비로소 알게 되고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위해 아들을 버리신 그 위대하신 설명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우리의 자아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우리 각 개인에게 찾아오심에 대해서 영원히 이를 잊을 길이 없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포로가 되어 버린 자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나를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며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왜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그 사랑 앞에 진실로 겸손한 자들이고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고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철저하게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라,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많아도 쉬 죽어지지 않는 깨뜨려 지지 않는 자아를 부여잡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하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깊이 더 깊이 생각함으로 오늘도 자기를 부인하며 고난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눈물 젖은 얼굴로 주를 좇고자 하는 자들은 절대로 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지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