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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되는 성도의 고난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
이흥수  |  solafide1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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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09  13:5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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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8장을 보면 로마로 호송을 당하던 바울 사도가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난파를 당하게 되고 멜리데 라는 섬에 상륙하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바다에서 막 올라 온 바울의 일행들을 위해서 마침 비가 오고 일기가 추워지자 원주민들은 따뜻하게 불을 피워 주었는데 바울 사도가 장작더미를 불에 던져 넣다가 그만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28 : 3)

장작더미를 불 속에 던져 넣자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서 순식간에 사도의 손을 물어 버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그 모습을 지켜본 원주민들은 ‘이 사람은 살인자가 틀림 없다’ 라고 말하며 사도에게 일어난 일을 심상치 않게 여겼다.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바다에서는 간신히 구원을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이렇게 독사에게 물려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흔히 일어날 수 없는 불행스러운 일들이 바울 사도에게는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을 성경은 톱아보며 기록하고 있다.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게 된 일도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에 한 번 당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뒤이어 곧 바로 독사에 물리는 또 한번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심히 불길한 일들을 사도는 연이어 겪게 된 것이다. 비단 이 사건 뿐만 아니라 바울은 회심을 경험한 이후 사도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결단코 평범하지 않은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갔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노라."(고린도후서 11 : 25~17)

한마디로 바울의 사도로의 전 삶에서 고난이 없었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으리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종에게 이러한 가혹한 고난을 사명의 길에서 허락하신 것일까? 이제 마지막 순교의 사명을 향해서 로마로 나아가는 노사도에게 평탄한 길로, 그간 수고로운 사역으로 인해 혹사했을 몸을 충분히 안식하며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그렇게 사도의  마지막 길을 가게 하실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마치 이 세상에서 버려둔 자 같이 사도를 대우하고 계시는 것일까?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린도전서 4 : 9~13)

사도의 삶에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던 고난의 깊은 신음을 이해하는 일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보다 중요한 진리는 이것이다.

복음을 수호하고 그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이들, 어두운 시대를 불꽃처럼 살아가야 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이 세상 가운데 나타 내셔야 하기에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무쇠처럼 단련하시고 연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이심을 사도의 삶은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도저히 한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포개어진 삶, 수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가야만 했던 그 외로운 길을 하나님께서는 사도에게 묵묵히 걸어가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땅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요 피할 수 없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유달리 고난이 끊이지 않고 핍박이 많은 삶을 살아가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볼 때가 있다. 그 남다른 시련과 고통의 삶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그분들에게 특별한 것을 기대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맡긴 자들을 그렇게 혹독하고 가혹하게 대우 하시는 분이시다. 그들이 고난의 예리한 칼에 베이고 고독의 창끝에 찔릴 수록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강력한 도구로 거듭나게 됨을 아시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 누군가에는 역설적인 고난과 견디기 힘든 시련과 박해로 그의 인생 속에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분명히 형통한 날도 곤고한 날도 이 모든 날들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명의 짐을 진자는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과 시련과 궁핍함을 당할 수 밖에 없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극도의 피곤에서 쉬 벗어날 수 없는 길을 걸어간다. 세상의 끝에 둔 자와 같은 대우를, 만물의 찌끼 같은 대우를 하나님께도 사람에게서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삶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극 소수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종들에게 허락된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고 그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기에 그 험난한 길을 가게 하시는, 그 무거운 고난의 짐을 모두 지우시는 하나님이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맡기시는 것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말이다. 과연 형통이 복일까? 과연 물질적인 번영이, 교회의 외형적 성장과 증가가 진정으로 우리가 바라는 궁극의 목적이 되어야만 할까?

왜 가난할 때는, 교회가 그렇게 크지 않고 성도가 많지 않을 때는, 비교적 건강하던 성도와 교회와 목회자들이 교회가 커지고 교인의 수가 증가하고 나면 왜 참된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순수하고 뜨거웠던 신앙을 잃어 버리게 되어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타락과 몰락으로 배도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일까?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고난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깊은 고뇌 속에서 새벽을 깨우고 밤 잠을 잊은 채 간절히 기도할 아무런 동기와 이유를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부패와 타락은 평화로움 속에서 형통함과 더불어 찾아왔음을 기억하라. 그 넉넉함 속에서 결국 진리를 떠나고 하나님 두려워 함을 잃어 버렸을 때 교회든 성도든 성직자든 결국 타락과 자멸의 길을 가게 된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한다.

우리의 타락과 변질을 막으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영혼의 방부처리, 그것이 바로 고난인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적인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시는 성도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조치, 인생의 황혼이 다가올 때까지도 여전히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만드는 안전장치,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붙드시는 자,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곳은 마지막까지 고난과 시련과 핍박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결코 하나님을 놓아 버리거나 마음이 해이 해 짐으로 인해서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하고 무너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영혼의 순수성을 보존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그들의 영혼을 고난을 통해서 붙드시는 분 이시다.

그러므로 왜 내 인생에서 고난이 사라지지 않는가 에 대해서, 왜 내 육신에 이러한 아픔이, 나의 현실에 여전히 궁핍함과 결핍과 여러 기도의 제목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성도 해석은 이제 바뀌어 져야 할 것이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 하면서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가난을 자랑하고 나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고난이 내게 족하고 그 고난이 내게 머물러 있어 내가 오늘도 눈물젖은 얼굴로 주를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머물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고난을 좋아할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고난에 동봉된 이와같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은총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마침내 하박국의 마지막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 : 17~18)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 : 12)

사도는 이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이것이 신자의 삶임을, 복음을 맡은 사명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임을 그는 자신의 모든 삶으로 그렇게 증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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