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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토막213

2022.12.19 08:44

hi8544 조회 수:389

<묵상, 설교 한토막>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거듭나게 되는 사람은 예외없이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회의와 의심으로, 그리고 권태와 싫증으로 믿음이 쉬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은 복음을 듣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게 되는 생애적인 회심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지식적이고 관념적이며 피상적인 상태에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실제로 교회를 다닌지 오래 되었어도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인생에서 어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고난을 겪거나 시험에 들거나 낙심하게 됨으로 인해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 심각한 의심과 회의를 갖게되는 경우들을 흔히 보게 됩니다.
 
온전한 중생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때 성경의 진리와 교리의 정밀한 가르침을 영혼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식적으로만 이것을 습득하거나 그것에 집착하게 됨으로 신앙의 모든 것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문제를 낳기도 합니다. 
혹은 선행이나 도덕적인 삶이나 율법적인 자기 열심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의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자기의 의를 삼는 기형적인 믿음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대속하신 은혜를 인격적으로 깊이 경험하고 그것을 현재적으로 지속해서 경험해 나아가는 일들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신앙은 반드시 중대한 오류와 결핍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중요한 가치를 놓치거나 잃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의 은혜를 경험했어도 이후 경건에 진력하며 성화에 힘쓰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만약에 복음을 통해서 올바른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경우라면 그 믿음은 더욱 흔들릴 수 밖에 없고 큰 시험이나 고난이나 죄의 유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게 되고 깊은 신앙의 침체에 빠지게 되는 일들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회심과 이후 경건한 삶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은혜를 공급 받고 성령의 인치시는 거룩한 은혜의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급격히 강퍅하고 완고하며 무감각하게 굳어지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 2장 4~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왜 성경이 이렇게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굳게 붙들고 그것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신앙은 생명력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권태롭고 신앙의 전반의 모든 것에서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이 습관과 형식처럼 여겨지고 예배를 비롯한 모든 신앙행위에 활력을 잃게 됩니다.
당연히 은혜가 고갈되는 것은 따라오는 순서가 될 것입니다.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 신앙의 시작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히브리서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모든 성경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설과 설교를 빠짐없이 듣고 진지하게 이것을 묵상하며 교리를 통해서 신앙의 뼈대를 든든히 세워 나아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회심에 이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혼의 간절한 목마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를 나오게 된 이유가 전혀 절박하지도 않았고 진실된 동기가 내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이지 않고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의 권유로 마지못해 교회를 다니게는 되었지만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열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진지한 동기 없이 오랜 시간을 기계적으로 교회에만 머물러 있게 된 경우입니다.
 
또는 신앙의 본질적인 동기가 아닌 다른 동기와 목적 때문에 종교적인 생활을 지속해 온 경우입니다.
인간 관계 때문이든지, 혹은 마음에 간절히 바라는 소원 때문이라든지, 정신적 수양 정도로만 신앙을 생각한 경우이든지, 일체의 진지함과 지속적인 신앙의 열정 없이 교회를 다닌 경우, 결코 회심과는 거리가 먼 종교적 관성을 신앙으로 착각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신앙의 진지하고 지속적인 열정을 갖게 경우는 거의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잡으면’ 이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굳게 꼭 붙들다, 보존하다 라는 동사인데 12절에서 ‘떨어지다‘ 라는 단어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동사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확실한 것이 있었어야 그것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작부터 확실한 것을,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분명한 회심과 믿음 없이, 그것을 경험한 바가 없어 여전히 의심스럽고 끊임없이 신앙의 회의와 반감이 생기는 뿌리 없는 신앙으로 무엇을 붙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굳게 붙잡고 신앙을 이어가고 계십니까..
 
분명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 없다면 환난과 핍박이 시작되거나 파상적인 사탄의 유혹이 영혼을 강타하게 되면 결국 추풍낙엽처럼 속수무책으로 배도의 길로 미끄러지게 되는 일들이 속출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성경적인 교리적인 분명한 지식과 십자가의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없게 되는 날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을 굳게 지켜야 할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 가치를 지켜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라도 진리를, 신앙의 고백을 수호할 만큼의 믿음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
 
어떤 일을 매일 3시간씩 10년을 지속했다면 그는 그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기능이나 지식을 익히는 일도 그러할 진데 교회를 수십년을 다녔고 성경을 배웠음에도 우리는 왜 여전히 신앙에 대해서 무지한 것 투성이고 우리의 믿음은 왜 여전히 지지부진하며 지리멸렬한 것입니까..

세상에서 어떤 일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집중했어도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지 않으면 벌써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신앙에 관한 문제만은 이렇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 버려 두는 것일까요..
 
왜 자신이 믿음의 전혀 자라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 원인을 진지하게 생각 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누가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올 한해도 그렇게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신앙의 괄목할 변화와 성장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온 한 해가 아니었는지 깊이 되돌아 보십시오.
이것이 정말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굳게 붙들 수 있는 그 구원의 확신, 그 기쁨과 감격과 영혼에 명백하게 새겨진 견고한 소망이 있어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더욱 강해져 가야 믿음을 끝까지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결국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못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매일 피차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의 미끄러지지 않도록 죄의 유혹으로인해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