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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토막154

2022.09.27 07:05

hi8544 조회 수:707

<묵상, 설교 한토막>

기독교의 진리와 그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진리의 교훈과 그 깨달음을 통해서 전달되는 분명한 특징을 갖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에게 바로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가 생애적으로 마음에 와 닿고 새겨지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중생하는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믿음을 주입하십니다.
 
그러므로 구도의 자리에서 중생과 회심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이를 위한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전제 하더라도 언제나 진리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부지런히 그 말씀과 그리고 경건에 대한 참 교훈을 깊이 사랑하며 그것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를 깊이 경험하면서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결국 나의 생각과 마음과 가치관의 총체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결국 신앙의 기형적인 성장을 통해서 올바르지 않은 비정상적인 믿음으로 영혼에 자리를 자리잡게 되는 중대한 문제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후에 다시 참된 진리를 통해서 부러진 뼈를 바로 잡듯이 다시 영혼을 올바른 진리로 교정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도의 자리에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고 진지함으로 마음과 영혼을 참된 진리를 향해 기울이는 자의 영혼 안에서 성령은 더욱 그를 참된 진리의 길로 회심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올바른 진리를 더 많이 듣고 그 들음에서 비롯된 영혼의 깨달음이 풍성해 질 수록 그것이 영혼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도구와 수단이 되어 우리의 지정의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 진리에 대해서 열려있으며 그 진리 안에서 분명히 내 영혼에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날 것을 믿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듣고 배울 수 있는 모든 시간과 모임을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듣는 만큼 깨닫고 이해한 만큼 믿어지게 되며 믿는 만큼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일에는 물론 성경의 역사와 은혜 베푸심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 모든 수단들을 통해서 반드시 내 영혼 가운데 찾아오시고 나를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진지하게 진리에 집중하며 진리를 듣고 그 은혜 베푸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 드린 바 대로 반드시 외부적 은혜가, 진리의 선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 하십시오. 우리의 노력만으로 득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은혜가 임할 때 근본적인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의 성품 아래서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봄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어떤 선한 의지보다 앞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회심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책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주님 오셔서 역사하소서 우리를 각성시켜 주시고 주님께 소환하여 주소서 우리로 주님을 향해 불붙게 하시고 당신에게로 이끄소서 우리에게 불을 붙여 주시고 더욱 달콤한 분이 되어 주소서
당신이 명령하시는 것을 허락해 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소서”
 
구원은 오직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자녀들에게 설명할 수 없이 큰 은혜를 부어 주심의 그 결과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나님께서는 영혼 안에서 반드시 행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 이러한 겸비한 영혼의 태도와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우리는 때때로 인생의 어떤 큰 실패나 시련이나 갈등이나 예기치 않은 질병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혹은 특별한 환경적인 어려움이 없다 하더라도 심적인 깊은 풀리지 않는 고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인생의 허무, 존재의 알 수 없는 이유, 인간의 죄 문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내면의 공허 등으로 깊은 내면적인 눌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보통 이러한 우리를 낮추시는 일들을 통해서 그것을 계기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어떤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전격적으로 찾아오십니다.
 
AD 386년 여름, 내면적인 영혼의 깊은 고뇌 가운데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습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 
‘집어들고 읽어봐 집어들고 읽어봐’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엇에 홀린 듯 고개를 숙이고 눈앞에 보이는 아무 책이나 한권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이었습니다. 다음 순간 성경의 이 구절이 그의 눈과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았고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구절 끝에 이르자마자 즉시 확신의 빛이 내 마음 안에 부어졌으며 모든 의심의 어두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회심의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을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것은 언제나 그의 영혼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했던 그의 어머니 모니카 였음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속에서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바라보는 간절함,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갈급함, 영혼의 깊은 고뇌, 하나님께서는 회심의 은혜를 베푸실 자의 영혼을 이렇게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영혼의 창가에 불어오는 미묘한 바람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지에 대한 거룩한 기대와 소망과 긴장감을 가져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