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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띄우는 목양서신195

2018.10.30 09:37

solafide1004 조회 수:381

<아침에 띄우는 목양서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막14:33-34, 개역한글)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의 시간이 임박해 오자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셨던 것처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시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심리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성경에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된 단어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그 괴로움은 유일한 것으로 모든 고통의 극치였음을 뜻합니다.


놀라다 라는 말의 의미는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다’, 라는 뜻으로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 정신을 완전히 잃을 정도의 상태를 뜻합니다.


슬퍼하다 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 뜻은 단순한 슬픔의 감정을 뛰어넘어 마음이 그 슬픔의 감정으로 인해 심히 짓눌려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께서 겪고 계셨던 마음의 고통은 고스란히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데 주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르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성을 가지신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가현설(假現說)이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합 되었다는 이단적 주장들을 모두 배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을 가지셨으니 동시에 독립된 인성을 가지고 계셨기에 신성으로 인성이 당하는 고통을 무마하거나 전혀 감소시킬 수 없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뇌와 고통은 완전한  것 이었고 ‘심히’ 놀라며 슬퍼 하시고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것 같은 감당키 힘든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당하신 정신적 육체적 심적 고통의 극치였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리가 명백하게 밝히는 기독론적 성경 해석이 이렇게 중요함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은 이 모든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움이 전부가 결코 아닙니다.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서 모든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고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모든 공포와 두려움과 슬픔을 그리고 큰 희생을 감당하면서도 자신이 걸어가야 할 그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 성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같은 지극하신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봅니다.

그 사랑을 신자라면 반드시 성경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향하신 그 사랑의 모든 내용들을 한자 한자 빠짐없이 성경속에서 찾아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향하신 그 사랑이 내 영혼의 모든 세포 속에 흠뻑 스며들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사랑인지, 그 사랑의 이면에 주께서 나의 죄를 위해 지불하셔야 했던 그 형언하기 힘든 고통의 무게와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결코 그것을 모르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깊이 경험한 그리스도인 만이 우리 구주를 배반치 않고 끝까지 그 좁은 길에서 이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나의 삶이 고달프고 힘드십니까.. 

나를 위해 주께서 감당하신 그 고뇌와 고통을 묵상하십시오.

오늘도 주께서 여러분의 모든 짐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평강을 허락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할 괴로움과 공포와 두려움을 모두 주께서 감당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순간이 올 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우리의 마음을 지키실 지를 기대하십시오.

 

오늘도 이 진리를 믿는 모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마음에 가득한 평강을 주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