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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 토막 336 (히 10:32-39)

2023.06.20 08:11

hc 조회 수:333

<묵상, 설교 한 토막>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될 때 우리가 맛보고 누리게 되는 그 충족감이 얼마나 큰지를 보십시오.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과 재산을 몰수 당하게 되는 일들을 당하게 되는 일 조차도 그 모든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당시 마게도냐와 데살로니가, 빌립보에 살아가던 성도들에게는 매우 흔한 일들이었습니다.

 

1세기 로마에서 있었던 민란의 결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고 추방되었으며 재산을 강탈 당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로마는 기독교 역시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하고 더욱 그들을 적대시하며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박해와 핍박의 날들을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살던 시대에 직면한 그 핍박과 환난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날들이 도래할 때 우리도 그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결연한 신앙의 모습으로 그 모든 날들을 이겨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할 때 어떤 모습으로 그 모든 고난들을 이겨냈는지를 보십시오. 사도행전 5 40~42절에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유대주의자들의 최고 종교회의 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사도들을 잔혹한 채찍질로 다스렸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다가 이같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문을 하고 핍박을 해도 그들은 풀어주면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야성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고 모든 박해 받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해 무엇을 더 버려야 할지, 포기해야 할지를 생각했고 그것을 기쁘게 여겼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때문에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을지 만을 생각합니다. 예수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위로와 감동을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만을 갈구합니다. 어떻게 그 믿음이 지향하는 바가, 그 내용과 질이 초대교회의 모습과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교회와 성도는 고난을 통해서 연단되고 그 믿음이 견고해지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지게 됩니다. 환난과 핍박이 극에 달랬던 시대의 교회와 번영과 형통과 평화의 시대의 교회를 역사 속에서 비교해 보십시오.

 

교회는 핍박과 조롱거리가 되고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될 때, 그 악조건과 환경 속에서 그 믿음이 만개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동맹을 맺은 성도들은 더욱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더욱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신앙 때문에 박해 당하는 성도들을 깊이 동정하게 되고 그들을 더욱 형제처럼 여기게 되며 예수 때문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더라도 그것을 영광스러운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고난 속에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록 우리가 누구인지가 분명해지게 되며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그 영광의 상급이 더욱 선명하게 우리의 마음 속에 각인되는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핍박을 두려워하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역사 속에서 가장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다운 그 영적인 담대함과 기백을 드러내던 때는 모두 모든 핍박과 박해를 당하던 때였습니다.

 

결국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갈 때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위대한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 핍박 받게 된 것을 자랑과 기쁨으로 여기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을 감격스러워하며 한 줌의 재로 변해 가던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할 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영혼과 정신 속에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기업인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소망은 이 땅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고난과 핍박을 능히 감당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의 확신, 내세에 대한 분명한 소망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영원한 미래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우리는 더욱 힘있게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감당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세의 확실성은 오늘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성도들과 함께 연합하고 힘을 모아서 믿음으로 감당해 내는 자들 안에 더욱 분명하게 새겨지고 확고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셔야 합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토해 내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는 우리에게 무엇이 예비되어 있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분명히 알고 이를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어야 결국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담대히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