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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 토막 415 (히 13:10-16)

2023.10.17 08:35

hc 조회 수:235

<묵상, 설교 한 토막>

 

히브리서는 이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삶을 좇는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재차 권유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다시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서 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능욕을 감당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영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신 주께로 나아가자고 촉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를 떠나고 오래 동안 속해 있던 가족과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선택이며 결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문 안에 있는 그 모든 안정되고 평안하고 자유롭던 것들을 버리고 이제 영문 밖,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치욕과 조롱과 멸시와 잔인한 박해가 있는 그 현장으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땅의 교회는 오래 전부터 현세 기복주의라는 거짓된 사탕발림으로 복음을 더럽혀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형통하며 번영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쳤고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헌신과 봉사와 충성을 일방적으로 강요했습니다. 순결과 거룩, 성화의 지표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모두 경쟁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물질적인 복을 받아 수직적인 신분 상승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외형적 성장의 동력과 기반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신앙이 성경에서 벗어나고 교리로부터 이탈하여 단순 무지한 현세 기복주의나 은사주의에 경도된 채로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 여기며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동력은 꺼져가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신앙으로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이 시대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기복적인 신앙으로 성공에 매달리는 그릇된 믿음으로 기형적으로 성장한 교회 안에 수많은 엉터리 신자들은 도덕도 윤리도 법도 상식도 벗어 던지고 거룩과 순결을 잃어버린 채로 그렇게 교회가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 이르도록 꾸준히 타락과 부패한 이율배반적인 삶으로 그것에 일조해 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신자의 믿음과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 세상 속에서 다시 빛과 소금의 삶을 회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버려짐과 버림의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시대에도 평안한 것과는 거리가 먼 성도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능욕을 우리도 신앙 때문에 감당하면서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야성임을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의 정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그저 무사안일하며 평안하며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갈등과 부딪힘과 대립과 그로 인한 핍박과 불이익을 조롱과 멸시를 기꺼이 주를 위해 감당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우리 또한 세상을 버리는 것을 각오해야 함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짐과 세상을 버림을 각오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때문에 모든 것을 누리고 즐기고 만끽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는 믿음 때문에 그 모든 대가를 기꺼이 지불함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진리와 너무도 동떨어진 시대에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는 아니 북한만 생각해 보더라도 신앙 때문에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과연 그러한 날들을 감당할 수 있으며 이 진리가 말씀하고 있는바를 지켜낼 정도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친 들판에서 자라나는 잡초와 야생화와 같은 생명력과 그 기백이 사라지고 온실 안에서 자란 화초같이 연약하여 쉬 타협하고 무너지고 붕괴될 수 있는 이 시대의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와 같지 않은지를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중심 뼈대는 바로 부활 신앙과 그리고 내세 신앙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그리스도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내가 죽음으로 모두를 살리는 그 신앙의 정신을 따라 편안하고 행복한 영문 안의 삶이 아닌 거칠고 고통스러우며 멸시와 비웃음과 조롱이 기다리고 있는 영문 밖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히브리 그리스도 인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문 밖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언제나 마음에 품고 생각하는 신앙의 치열한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나의 행복과 성공과 자아 성취가 그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수록 우리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나타내기 위한 그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삶을 각오하며 그것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한 역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계획은 자기의 안위와 안정을 지향하는 자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복음 때문에 진리 때문에 모든 불이익을 당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죽이는 삶,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지향하는 자들의 그 치열한 삶을 통해서 이룩되고 성취됩니다. 무엇인가 막혀 있고 해결이 되지 않는 가운데서 우리의 해법은 우리의 이익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갈등과 분열이 아닙니다. 우리를 죽이고 희생하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자 하는 그 마음과 결심에서 결국 막힌 담이 무너지고 벽이 허물어지며 갈등이 해소되고 분열이 봉합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문 밖에서 자기를 버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화목케 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고난과 능욕을 나의 것으로 감당하며 영문 밖으로 우리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 놓고 나를 부인할 수 있는 그 믿음의 근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14절의 말씀처럼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능욕과 조롱과 멸시와 외면과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좋아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 땅에서 그러한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전부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삶이란, 진실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을 확고하게 가진 자의 삶이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일념으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진리의 그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선택과 결정을 내리면서 우리의 인생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삶들을 신자는 이 세상에서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