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묵상, 설교 한 토막 424 (갈 3:21-27)

2023.10.31 08:23

hc 조회 수:227

<묵상, 설교 한 토막>

 

로마 카톨릭은 구원은 은혜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것에 더해 인간의 부단한 선행을 위한 노력과 공로가 요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숨막히는 교권주의 아래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참 자유와 평강을 얻지 못한 채 종교적 권력과 권위에 짓눌리고 지배 당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은 부단히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성취감과 자부심을 얻으며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도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던 어리석음은 오직 은혜를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의 교리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이단시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고 인간의 불완전한 의지와 행위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그것으로 썩은 동아줄 같은 구원의 끈을 붙드는 어리석음을 좇고자 했던 일은 교회 개혁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이 땅에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필연적인 이유였습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킴으로 의로워질 수 있는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 아래의 그 무거운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복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그 새 언약이 우리에게 주는 생애적인 감격과 마주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손을 잡고 그 앞으로 인도하는 초등선생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일 뿐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실존을, 그 죄악된 실체를 보게 하고 인간 자신에 대해서 깊이 절망하게 함으로 마침내 십자가의 앞으로 나아가게 하며 그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함으로 그리스도 앞에 백기를 들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자유를 얻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존재인지를 보게 함으로 그러한 죄인들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영혼 안에서 겸손의 길을 닦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신 또 다른 종류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의 권세는 의도, 자유도 아닌 죽음이며 절망입니다. 율법 아래서 결코 의롭지 않은 존재로서의 내 자아를 철저하게 깨닫고 발견한 자라야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그 위대하신 은혜와 그 사랑을 마침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삶을 드려 그분의 발 앞에 복종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제 내가 살아가는 그 이유가 나의 행복과 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의미 있는 생애로 그 삶의 모든 목적과 방향이 수정되고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요구되는 모든 대가를 지불하는 희생과 섬김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이 땅에서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인들은 인간은 스스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신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 길을 찾게 되어 있다는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신앙처럼 붙들고 살아갑니다. 인류가 걸어온 이 장구한 역사와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전적으로 무능하고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로 낙인 찍는 기독교의 복음을 거부하고 혐오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얼마든지 진화하고 더 발전하며 진보해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로 믿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기대를 결코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왜 기독교의 복음을, 십자가를 그토록 멸시하고 거부하며 부인하는 것입니까.. 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부정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없으면 인간의 존재는 완전해질 수 있고, 성경이 말씀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그 추악함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모든 부패한 정신과 악한 사상들과 이념들이 모두 악으로 규정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가치를 그토록 거부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개념 그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도록 만들기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즉시 인간의 가치와 존엄과 그 존재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은혜가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모든 불행과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며 인간들의 삶의 모습 속에는 그 어떠한 악도 존재하지 않을 만큼 도덕적으로 선하고 정의롭고 완전한 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어떤 은혜와 긍휼도 필요 없을 만큼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아왔다면 그럼 우리 모두는 지금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이 완전히 충족된 삶으로, 우리가 노력한 대로 모든 것을 성취하고 이루어 가장 아름답고 다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유대주의는 과연 인간에게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주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혀 불필요한 가치였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교리는 죄인들에게 참된 평강과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게 했습니까.. 그렇다면 교회 개혁이라는, 무지의 흑암 속에 있던 교회를 깨우시고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는 결코 일어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완벽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일순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고 우길 수는 있어도 이내 다시 불안해지고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으시는 놀라운 주의 은혜가 임하기 전까지 인간은 모두가 자기의 삶에 대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삶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정직했고 정의로웠으며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행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신에게 당당하게 살아왔으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다 이루어져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사랑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살아온 삶에 대한 넉넉한 보상을 받으며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지금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 지셨습니까..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한 채 무지하고 어리석음 가운데 선택하고 결정한 모든 것이 결국 고통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의 인생에서 그 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된 괴로운 현실을 우리는 매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결국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는 가련하고 불쌍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으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한 인생의 길을 지나가는 동안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그 모든 날들을 감당할 넉넉한 은혜와 피할 길을, 그리고 모든 고난을 극복할 힘을 시마다 때마다 부어 주심으로 인생의 모든 길을 동행해 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직 은혜가 임할 때 인간은 자신을 의지하고 자랑하며 오만하게 살아왔던 어리석은 자신을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여 교만하고 도도하게 살아왔던 그 모든 삶이 모두 부끄러운 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행한 무지 속에서 지은 모든 죄들로 인해 인생은 괴로움과 고통과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을 마침내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