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묵상, 설교 한 토막 355 (히 11:13-16)

2023.07.17 08:23

hc 조회 수:285

<묵상, 설교 한 토막>

 

‘모든 이들이 믿음을 따라서 죽었다. 약속들을 취하고 나서가 아니다 도리어 멀리서 부터 그것들을 보면서 그리고 환영하면서 그리고 그들이 땅 위에서 외국인들과 나그네들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 사람들이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과 창대하게 될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모두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것을 믿고 바라고 소망하며 일생을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단지 마음으로 바라고 확신하며 그 일을 기뻐하면서 그렇게 자기들의 인생을 지나갔던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그들이 다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 2절은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영원한 가치를 생각하고 그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6 19~20절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보물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믿고 그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라고 주께서는 우리에게 교훈하셨습니다. 믿음의 궁극의 목적지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현재, 지금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그 목적이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를 변화시켜서 어떤 상황에서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믿음을 가지고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존재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믿음의 가치를 좇아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하고 실행하며 이에 따른 모든 반대급부와 그 대가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던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할 때 그 아름다운 죽음을 가리켜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고 살다가 믿음 없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미래는 영원히 나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지금 당장 눈 앞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신앙은 먼 곳을, 먼 미래를, 궁극의 죽음 그 이후 까지를 소망하고 응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은 지금 오늘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성취되고 보여지고 나타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먼 훗날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됨을 바라고 소망하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것까지를 바라보고 있느냐의 문제는 우리의 믿음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 영원한 미래에 대한 확신까지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고작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문제만을 해결 받기 원하는 것으로 믿음의 동기와 목적과 지향점이 거기에 이를 뿐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견고해야 하며 믿음이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틀림없다는 것을 진리 안에서 날마다 확인해야 합니다. 신앙은 그것에 집중하며 바로 이 부분을 계속해서 주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내면 안에서 강화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야 믿음을 따라 살고 믿음을 따라 기꺼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내세와 연결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명한 내세관, 내세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오늘을 담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때로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과 박해가 와도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지나갈 것과 그리고 궁극의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하며 오늘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가치입니다.

 

확신 가운데 결연히 바라볼 분명한 미래가 없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분명하고 명확할 때에만 신자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을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며 그 믿음이 지향하는 궁극의 결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고 견고케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오늘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