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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2014.10.23 19:26

SDG 조회 수:2971

'영국 신학자들의 황태자', '칼빈에 버금가는 학식을 가진 천재' 그에 대한 화려한 수식어가 말하듯 그는 청교도들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영국의 옥스퍼드에 가까운 스테드햄 출생인 그는 지역 교구의 목사였던 헨리 오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세에 옥스퍼드의 퀸스 칼리지에 진학해서 고전, 수학, 철학, 신학, 히브리어 등을 수학했다. 

오웬은 십대 때 하루 18시간에서 20시간을 공부했다.

26세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41년 동안 8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모든 저술들은 주옥과도 같이 귀한 고전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지금까지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


1643년 오웬은 예정교리,원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속죄의 범위, 구원에 있어서 인간 의지의 역할 등에 대해서 검토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 자들을 논박하는 고전적인 칼빈주의에 대한 강력한 해설을 담은 <아르미니우스를 드러냄> 이란 책을 출판함으로 그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교구민들에게 교리문답을 교육 시키는 일에 탁월 했으며 교리문답 책자를 어린 아이와 성인들을 위해 한권 씩 총 두권을 저술하기도 했다.


오웬은 메리 루크와 결혼해서 열한 명의 자녀들을 두었지만 단 한명의 딸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 시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남겨진 딸도 불행했던 결혼을 끝낸 직후에 페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640년대 설교와 저작들을 통해서 그의 명성은 급격히 퍼져 나갔으며 30대 초반에 이미 천 명이 넘는 성도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 왔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 앞에서 히브리서 12장 27절을 설교하여 큰 감명을 주었고 그로 인해 궁정 목사로 또한 영국 의회가 인정한 설교자로 의회에서 설교 하기도 하였다.


1651년 그는 옥스퍼드 크리스트 처지 대학의 학장이 되었고 18개월 뒤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이 되었다.

그는 이 시절에 '성도의 견인', '그리스도의 대속', '죄 죽임', '삼위일체와의 교제', '분리', '유혹'. 성경의 권위에 대한 주요 작품들을 포함한 수많은 저서들을 출판했다.''


오웬은 크롬웰이 왕이 되려고 한 것을 반대한 것으로 호국경 시절 말기의 크롬웰로부터 호의를 잃게 된다.

1665년 그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고 피신하는 동안 저 유명한 '신자안에 내재하는 죄', '시편 130편 강해' 그리고 방대한 '히브리서 주석' 의 첫 권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1674년 오웬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전이 될 성령론을 출판했고 2년후 아내와 사별하고 18개월후 미망인 도러시와 재혼하였다.

오웬은 말년에 천식과 담석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고 이 질병들로 인해 설교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저술에 매달려 '칭의' 와 '영적인 사고 방식'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 등의 주요 작품들을 쏟아 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혼신의 노력을 다해 지성적으로 헌신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죽기 하루 전에 그의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에 썼다.

"나는 이제 내 영혼이 사랑했던 분, 아니 오히려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신 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 위안의 전부였습니다. 

나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교회라는 배를 남겨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선장이 그 배에 계신다면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가련한 사람 하나가 없어진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깨어서 기도하며 소망으로 참고 기다리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꼐서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지금도 견고히 서 있습니다"


1683년 8월 24일 오웬은 당대의 많은 청교도들이 안장 되었던 번힐 필드에 안장되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나팔소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