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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와 성탄절

2014.12.03 15:48

SDG 조회 수: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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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축전은 전체가 연례 반복 드라마 같은 느낌이다 



만년(萬年) 아기 예수?

-크리스마스 지킴은 개혁신앙에 위배된다 


김삼

 


들어가는 말


이번 글의 도입부 삼아 먼저 몇 마디를 하련다: 


필자가 소속된 개혁교/장로교를 비롯한 기독교 정통 교파들이 성경이 아닌 천주교에서 유래된 소위 '성탄절'과 '부활절' 전통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단적으로 말하는데, 성탄절/부활절을 준수하는 것은 개혁신앙에 위배된다! 개혁장로교가 그토록 간판마담처럼 내세우는 스위스의 개혁가 장 칼뱅, 그의 조력자들인 기욤 파렐과 신학자 피에르 비레, 장로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스코틀런드 개혁가 존 녹스, 독일/영국 개혁가 마르틴 부처(Bucer) 등은 분명히 이런 절기준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점에서 성경적이고 옳았다. 아울러 개혁파가 그리도 중시하는 청교도들, 그리고 심지어 20세기까지도 일부 올바른 장로교 사람들은 성탄절/부활절 지킴에 강력 반대했다. 

오직 마르틴 루터나 일부 다른 개혁가들만 천주교에서 그대로 받아들인 크리스마스 전통을 계속 지켜 나갔을 뿐이다. 루터는 이 점에서 현저히 뒤틀리고 잘못되었다. [ 그러나 필자는 루터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이 아무리 개혁신앙을 최고의 정격 신앙인 양 호언장담하며 강조하고 자랑해도, 그들이 성탄절/부활절 전통을 계속 생각없이 그대로 지켜 나간다면, 그들의 자랑과 강조가 별 의미가 없고, 모순되며 위선이다.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 격인 셈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 분의 말씀 진리를 초월하시지 않는다. 아닌 것은 늘 아닌 것이지, 시대에 따라 진리가 될 수 없다. 성탄절과 부활절을 복 주시라고 그 분께 부탁드려도 그러실 리가 없다. 교회 안의 비진리를 그냥 안타깝게 관망하실 뿐이다. 말씀으로 바로 깨닫고 고칠 때까지. 



우리 한국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심겨지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말기, 미국 북장로교와 감리교, 미 남장로교 등을 통해서였다.   

한편 1891년 L.B.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등 일부 신학도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다가, 1892년 테이트와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윌리엄 매클리어리 정킨(한국명 전위겸) 등 3명이 남장로회 파송 선교사로 선정됐다. 이들과 연계된 4명의 여성들도 합세해 '7인의 선발대'가 와서 훗날 북장로교 선교사들과의 연합모임인 '미꽅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당시까지도 복음화되지 못했던 전주 등 전라도/충청도를 선교하기 시작했다. 1897년엔 호남 지역에서는 최초로 전주에 사는 5명의 한국인 신자가 세례를 받았다. 역설적으로, 거의 마지막에 복음을 받은 호남지역은 그후 한국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곳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미국 남장로교 총회는 1899년 '성탄절'과 '부활절'이 정상적인 기독교 안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다: 


   "성경에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거룩한 날로 준수함에 대한 보장이 없고(갈라티아서 4'9~11, 콜로새서 2'16-21 참조), 그런 준수는 개혁신앙 원리에 위배되며, 자의적 경배(콜 2'23)를 조장하며, 예수 크리스토님의 복음의 단순성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파견된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들은 자기네 교단에서 채택한 성탄절/부활절 관련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다룬 것인가? 이에 대한 기록을 현재 미처 찾아볼 수 없지만, 아무래도 파송 선교사였기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았거나, 해당 교단 소속 선교사라 할지라도 교단 본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딴 교파/교단 선교사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남장로회의 한국 선교는 미국에서 한국을 널리 알렸던 북장로교의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절대적인 공헌에 의하여 시작됐기 때문이다. 만약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성경적인 교단 결정을 그대로 지켰다면, 호남지역은 처음부터 카톨맄적인 성탄절/부활절 전통을 지키지 않았어야 옳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한국 장로교의 성탄절/부활절 지킴 전통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됐고, 교파 간의 타협이 포함된 이러한 에큐메니즘 정신에 의하여 지속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초기 선교사들은 무지 탓에, 또는 부지불식간에, 또는 인위적 열성과 욕심에 의하여, 파울이 경계한 '자의적 경배'(콜로새서 2'23)의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성탄절 전통을 선교에 도움된다고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삼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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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의 남장로교(PCUS) 파송 선교사 '7인 선발대'. 이들은 한국 초기 선교사 총회인 '미꽅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충청/호남 지역의 선교에 나섰고, 전주에서 첫 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남장로교는 1899년에 성탄절/부활절 전통을 공식 부정했다. 맨 윗줄 왼쪽부터 메리 레이번 정킨(W.M. 부인), 퍁지 볼링 레이놀즈(W. D. 부인), 중간 줄: 한국인 이재원(언어교사), 루이스 보이드 테이트, 윌리엄 매클리어리 정킨(아들 조지를 안고 있다),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마타 '매티' 새뮤얼 테이트 (루이스 테이트의 누이), 앞줄: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이들이 만약 교단 결의를 따라야 했다면, 충청-호남 지역 신자들은 당시부터 성탄절/부활절을 지키지 않았어야 옳다. [사진출처: PCUSA]  



필자가 신구교 '크리스마스' 전승의 비성경성을 지적해온 지도 여러 해째다. 성경적이 아님을 깨달은 이래로. 중세 천주교에서 전래된 크리스마스/이스터(='부활절') 전통들을 연례 행사로서 지키는 교계 풍토 속에서 여전히 지내고 있음을 간혹 서글퍼 한다. 그렇다고 어디론가 달리 빠져나갈 뾰죽한 출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러길 바라지 않는다. 그냥 혼자서 성경주의를 고수할 뿐.  

나는 '안티'도 아니고, 반 크리스마스 전도사로 발벗고 나선 것도 아니다. 내 말을 듣고 딱히 동요될 교인이나 지도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 아니 거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문제집단의 하나인 말씀보존학회나 안식일교 등이 자기네가 유일한 '참된 교회'임을 입증하려는 양 기성교회의 뒤통수를 치려고 안티 신/구교 작전의 일환으로 반크리스마스주의를 이용해 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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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왜 이렇게 교회를 쓰러뜨리고 무너뜨리려 하나, 망가뜨리려나?"라는 의아스런 물음도 간혹 듣곤 한다. 성경 교훈 지키기가 곧 교회 무너뜨리기라는 등식이라도 있다면 가능한 말일 것이다. 


나 자신 당장 어떤 거창한 개혁으로 크리스마스의 전통을 한꺼번에 뒤집어 없겠다는 것도 아니다. 난 기성교회들이 안 되길 바라는 게 아니라 다 잘 되기 바란다. 특히 참된 교회의 거듭난 성도들이 무사히 성경말씀에 근거한 신앙으로 구원의 완성이 충족되길 빈다. 

다만 가릴 것은 제대로 가리자는 입장이다. 중세 이후 교계에 여전히 잔존해 있는 비성경적인 요소에 대한 성경의 바른 답변이 이렇다는 것을 알리고 싶을 뿐이다. 

필자에게 "왜 안식일교나 어떤 침례교파처럼 크리스마스 전통을 반대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그럼 왜 역사 속의 개혁가들은 크리스마스를 반대했는지..그들도 안식일교 편이어서였는지? (안식일교의 뿌리는 본래 신교에서부터이며 안식일 준수파는 윌리엄 밀러보다 훨씬 이전, 이미 16세기 이전에 존재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성탄절 행사는 참된 경배이기보다 일종의 연례 반복/순환극이라고. 좀 더 직설한다면, 카톨맄 식 '환생/윤회' 드라마 같다. 아기 예수는 이미 2000년전 오셔서 유소년/청년으로 성장하셔서 3년간 사역을 하시다 수난/부활/승천을 거쳐 현재 하늘 대사제(대제사장)로 계신데도 불구하고, 그 분의 초림이 마치 영원히 되풀이되길 바라기라도 하는 양 매년 이맘때 아기 예수와 자잘구레한 탄생 배경을 재현하면서 자못 진지하게 몇 주간 '대림'(待臨)이란 것을 하다가 "오늘 나신 예수는.." 하고 탄생극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재탕도 이런 재탕이 없다. 언제까지 우리가 '성탄탕'을 우려내어 먹을 것인가? 


이런 모습을 보고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박장대소하시며, "오 얘들아, 고맙다! 올해도 어김없이 내 생일 파티인가? 그래라, 즐겨라~! 지화자 어절씨고, 어허라 좋구나, 매년 꼬박꼬박 즐겨다오. 내년까지 또 기다리마." 하시고, 마리아더러도 "성모님(여인이여), 처녀 몸으로 저를 배고 낳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올해도 제 생일 파티를 함께 즐겨 주세요~. 메리-크리스마스(Mary-Christ-mass?)!" 하실 텐가?

아니면.. "헐~, 아니 내가 태어나 성장하고 부활하고 승천한 지가 언제고, 여지껏 하늘에서 자기네를 중보해 주고 있는데, 아직도 나의 아깃적 시절을 축하하고 있다니, 내가 만년 아기란 말인가. 내가 아닌 지네들이 되레 아기 같은 쟤네들이 언제 철들까...쯔쯔쯔..." 하실 텐가? 


난 분명히 후자라고 믿는다. 예수님이 '만년 아기'가 아니라, 교회가 만년 아기 같고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아이들의 반복 드라마 같은 크리스마스를 되풀이하니까. 


이것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분명히 잘못된 전통이다. 미사 때마다 늘 빵과 포도주 속에 작은 예수의 몸이 들어 있다고 상상하는 천주교의 성체성사의 미신적인 신비주의를 연상시킨다. 맞다! 크리스마스는 신비주의적 관행이다. 아울러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만족을 위한 이벤트들이다. 인위적 신비주의와 심리/심리학-서로 상통한다!  


하나님과 사도들, 아니 예수님 자신조차 그 분의 연례 생신축하 행사를 가지라는 지시를 결코 내리신 바 없다! 아니 이럴 줄 미리 아시고 아예 탄생일을 알리시지도 않았다. 부활의 날짜도 가르쳐 주신 적이 없다. 꼭 필요하다면, 유대력 무슨 달 무슨 날이라고 명시하셨을 터이다. 필요 없는 것을 갖고 필요 없는 상상을 하고 필요 없는 신비를 부여하여 필요 없는 이벤트를 지난 여러 세기동안 벌여 온 것이다. 아니 알고 보면 해선 안 되는 것을 해 온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신교권 대다수는 구교를 본받아(!) 성탄절/부활절 등의 절기를 지켜왔다. 그래서 구교 사람들이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것 한 가지가 장 칼뱅, 존 녹스 등 주요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이 분명 성탄절을 거부했는데도 자기네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개혁권 사람들이 여전히 매년 '크리스토 미사'(Christ+mass=Christmas)를 착실히 지켜 준다는 점일 것이다. 신구교 공동 성탄절 지키기는 카톨맄 예수회의 역사적인 주요 어젠다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성경상으로 크리스마스 전통의 문제점을 말해 왔지만, 이번 글에서는 개혁가들의 반성탄절적 견해를 구체적으로 들어 본다. 


개혁가들 대다수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포함, 소위 '교회력'을 온통 장식해온 중세 천주교의 모든 축일/절기들을 총체적으로 철폐하기를 바랐다. 둘 다 구교에 의해 처형 당한 보헤미아 개혁의 선구자였던 얀 후스, 프라하의 예로님 프라츠키 등도 그러했다. 

그러나 성탄절에 대한 일부 일부 개혁가들의 견해는 서로 달랐다. 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태도는 혼동스럽다. 처음엔 천주교의 모든 절기를 철폐하기를 바랐다가 나중엔 성탄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흰눈 위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추리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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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추리를 즐기는 루터네 가족 그림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이 그토록 숭앙해 온 칼뱅이 대표하는 제네바는 크리스마스를 반대했다. 나는 나 같은 일개 인간에 불과했던 칼뱅의 비성경적인 사상 상당량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의 이 점은 옳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개혁파들이 역시 그토록 존중하는 청교도들도 성탄절을 엄금했다. 미국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성탄절 전통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심지어 벌금을 매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현대 개혁주의자들은 언필칭 칼뱅의 신학과 청교도 신학을 자랑삼으면서 왜 칼뱅과 청교도의 노선을 벗어나 성탄절 전승을 여전히 지키는가? 일대 자체 모순 아닌가?

  


칼뱅과 제네바의 입장


칼뱅이 프랑스/제네바 개혁가 기욤 파렐의 주선으로 제네바에 오기 전, 이미 제네바에서는 파렐과 그를 돕는 위대한 신학자/설교가 피에르 비레에 의하여 성탄절/부활절 관행이 금지되고 있었고, 칼뱅은 이에 기꺼이 합의했다.  


1546년 제네바 사역록(Registres de la Compagnie des pasteurs de Genève)에는 "개혁에 위배되는 오류 목록"이 있었는데 '미신'에 관한 지시사항에서 "로마교회의 축제나 금식 재일(齋日)을 지키는 자는 견책만 받을 대상이다. 완고하게 반항적이지 않는 이상."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말은 적어도 유렆의 개혁본부 구실을 한 제네바에서 성탄절 전통 준수가 첫째로 '오류'이고, 둘째로 '미신'일 뿐더러 셋째로 당대의 견책 대상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제네바의 결정이 잘못인가, 아니면 그들이 이처럼 단죄한 성탄절 전통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현대 개혁교회가 잘못인가?


1550년 11월 16일. 경축휴일에 관한 제네바 칙서가 내려졌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주일날을 제외한 모든 (천주교) 축제일의 폐기처분을 존중한다"는 교칙이었다. 성탄절을 포함한 이 축제일 금지는 일각에서 소동을 일으켰고 칼뱅이 선동을 사주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칼뱅은 이 결정에 직접 관여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베른의 목회자, 요한 할러에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그는 "내가 시에 들어가기 전, 주일을 제외한 축제일은 없었다"면서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지금 합의되어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뜻일까? 칼뱅마저도 성탄절을 반대하진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일까. 과연 이 경우 제네바 의회와 칼뱅,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아무튼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이 당시 제네바에선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탄절 준수와 금지-어느 쪽이 더 바른 개혁전통인가? 성경적으로는 후자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칼뱅은 "비록 나는 그것(금지조치)의 주동자도 선동자도 아니지만, 이미 된 일에 대해 유감스럽진 않다."고 말했다.  칼뱅의 다소 어정쩡한 자세가 맘에 들지 않지만, 제네바의 성탄절 준수 금지결정에 유감없이 동의한 것만은 명백하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칼뱅의 이런 자세가 이해되기도 한다. 개혁이 자칫 과격해지는 나머지 첫 신교도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킬까 우려했던 것이다. 나도 나의 이런 입장이, 신자들이 기존교회를 마구 단죄하고 모든 것을 반대하는 어리석고 격앙된 율법주의적 반응을 일으키길 원치 않는다. 사랑 안에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칼뱅의 저작물 가운데 추후 예배의 정규원리라고 규정된 데 따르면, 모든 유형의 예배가 합법적이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준해야 한다고 돼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성경엔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 성탄절 준수 관행은 비합법적이라는 결론이 난다. 


이를 반영하듯, 칼뱅은 놀랍게도 카톨맄교에서 유래된 소위 '교회력'에 맞춘 설교를 하기는커녕 거기 대하여 전혀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그는 옳았다. 


하지만 더 놀랍게도 오늘날의 개혁교회 대다수는 천주교의 성인축일들을 제외한 구교 교회력 대부분을 철저히 지키는 쪽이다. 설교가들이 알뜰하게 교회력에 맞추어 설교를 하고, 대강절엔 알록달록 색상별 무드까지 조성하지 않는가. 예술적 무드는 좋지만, 표현 속엔 진실이라는 알맹이가 담겨 있어야 한다. 

즉 칼뱅을 간판 마담 격으로 앞세우는 개혁교회가 이 점에서는 칼뱅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걸어왔다는 게 '불편한 진실'인 셈이다. 왠 모순일까.


그밖에도 칼뱅보다 앞서 피에르 비레와 칼뱅을 제네바에 끌어들였고, 칼뱅의 조력자로서 프랑스-스위스 개혁에 기여한 기욤(=윌리엄) 파렐, 악령/마법 비판연구의 선구자와 기독교 물리학자로 역시 칼뱅주의 신학자였던 랑베르 다네오, 그리고 칼뱅의 사후 그의 후계자로 제네바를 이끌었던 역시 테오도르 베자 역시 칼뱅의 이런 입장을 따랐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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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개혁가들 4총사 (왼쪽부터 기욤 파렐, 장 칼뱅, 테오도르 베자, 존 녹스). 이들은 모두 성탄절/부활절 준수를 반대했다. 



우를리히 츠빙을리


칼뱅과 같은 스위스이면서 취리히에서 개혁을 주도한 우를리히(또는 훌드리히) 츠빙을리 역시 강력한 절기 지킴 반대자였다. 그는 루터가 95개조로 반론하기 수년전에 이미 면죄부를 단죄하고, 바티칸이 주도하는 '교회 전쟁'에 스위스 용병들이 기용되는 것도 비판했다. 그는 몸소 행동으로 본때를 보여, 일찌감치 1523년 12월 25일에 기존 미사를 심플하고 훨씬 성경적인 성만찬으로 대체했다. 빵과 잔의 예식을 하겠다고 예고하고, 그날부터 이후 내내, 예식과 간단한 성경강해로써 천주교의 '성사'를 갈아치웠다. 취리히 시는 이내 츠빙을리의 새 전통을 받아들였다. 

루터처럼 본디 천주교 사제로 취리히 시 정부의 담당 사목자였던 츠빙을리는 카톨맄 성직자의 독신제와 사순절 금식도 반대했다. 그의 제자들은 사순절 금식을 깨고 공공연히 소시지를 먹어댔다. 1523년엔 지역 성당에서 예수 크리스토/마리아/성인 등을 그렸다는 초상과 성화를 모조리 없애버려, 이 방면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 1524년(일설엔 22년)엔 사제인 그가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했다. 


츠빙을리는 1529년 헤세의 필맆의 주선으로 마르부르크로 가서 루터와 만나 많은 면에서 서로 교감했으나, 천주교에 가깝게 "성찬에 예수께서 현존한다"는 루터의 말에 거슬려 이후 불화하게 됐다. 루터는 악수도 하지 않고 떠났다고 한다. 츠빙을리는 스위스 용병의 군목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시신은 교황주의자들에 의해 짐승의 똥 사이에 묻혀 죽었으니, 개혁가들중 진정한 순교자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츠빙을리는 마리아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비록 중재자로 믿지는 않았으나. 



마르틴 부처(Bucer)


알자스-로레인 지방의 비셍부르(봐이센부르크), 스트라스부르그 등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서로 성찬관이 달랐던 루터와 츠빙을리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했고, 바티칸과 분리된 신성로마제국만의 교회를 창설하려고 운동하다가 영국으로 피신하여 그곳 개혁에 일조하다 생을 마감한 개혁가, 부처는 비록 신교 초기 에큐메니스트라는 이미지를 얻긴 했지만 크리스마스에 반대한 한 사람이다. 그는 천주교의 온갖 화려한 축일과 달리, 영국교회의 예배의식과 기도문 등이 단순해지길 바랐다.  


부처는 말년에 지내던 영국에서, 마태복음서 12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내가 보건대, 하나님께는 주님의 날 이외의 모든 '성일'은 철폐되었다고 본다. 우선 그들을 '성일' 준수로 끌어들인 그런 열정에 대한 말씀의 뒷받침이 없고, 단순히 부패한 이성을 따른 것이며, 한 못이 다른 못을 밀어내듯 이교도들의 '성일을 밀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 '성일'들은 미신으로 너무나 부패한 나머지, 우리가 그것들의 이름을 들을 때 떨리지도 않는지 나는 의아스럽다."


부처에 따르면, 성탄절/부활절도 하나님 앞에서는 철폐된 대상이며, 따라서 성일이 아니다. 그런 성일들은 성경적 근거가 없이 이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교도적/미신적 요소가 아직 교회 안에 남아있는 셈이다. 더욱이 그런 이름들을 감히 '성일'로 부르는 것을 들을 때 두려워 떨려야 하는데도, 우리는 그러지를 않는다. 오늘날 휴일이라는 말인 영어의 holiday는 본디 holy day 곧 성일-거룩한 날에서 온 말이다. 



이러한 개혁가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1574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도르트(도르트레히트) 총회는 성탄절을 폐지했다. 1578년 벨짘 교회들(벨짘 신조를 고백하는 교회들)의 총회 역시 그러했다. 

제임즈왕역 성경(KJV)으로 유명한 제임즈 1세 왕은 장로교와 청교도들을 싫어해 크리스마스를 고수했으나, 그후 1647년, 당시 청교도들이 주도한 영국의회는 크리스마스를 폐지하고 금식일로 대체했다. 그러자 크리스마스 지지자들이 난동을 일으켜 캔터베리를 점거하고 그 복도를 상록수로 장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1660년에는 찰스 2세에 의하여 또다시 성탄절 전통이 복구됐다. 



스코틀런드 교회와 존 녹스의 입장


녹스의 견해


칼뱅과 제네바의 강력한 영향력을 받으며 스코틀런드 개혁을 주도한, 장로회의 진정한 선구자인 존 녹스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그는 제네바측보다 훨씬 진일보한 강력한 교회명절 지킴 반대자였다. 교황주의자들과의 공개토론에서 녹스는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선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들의 축제의식을 단죄하오. 명백하오! 하나님의 단순명료하고 직설적인 명령은: '너희들의 하나님 예호봐(여호와)께 행하여 드리려면, 너희 눈에 좋게 보이게가 아니라, 예호봐,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한 대로 하거라. 아무 것도 가감하지 말고.'(신명기 4'2; 12'8,32 참조)라고 했소. 하나님이 그대들의 축제의식을 명하셨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이전 명령이 그대들과 그것들(축제의식)을 단죄할 것이오." 


무턱대고 해온 성탄절 준수에 대한 참으로 적절한 경고가 아닌가? 이에 따라 스코틀런드 교회는 천주교의 모든 부패상을 배격하는 동시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전통의식도 몽땅 철폐했다. 


이러한 개혁가들에게서 느끼는 점은 그들은 결코 크리스마스를 중시하지 않고 하나의 천주교 의식으로 철저히 낮춰 봤다는 것이다. 


1560년 녹스와 몇몇 스코틀런드 개혁가들은 '제1 제자훈련서'를 펴내는데, 이 책의 '교리 제1항'은 크리스마스를 비롯한 축제일을 다음과 같이 강력 단죄했다: 


   "...사람들과 법령들, 공의회나 헌법 따위에 의거한 모순된 교리들이 하나님 말씀의 분명한 명령(준거)도 없이 인간양심에 부과되어 왔다: 독신서원, 혼례전서약, (사제/수사/수녀복 등) 여러 가지 복장으로 남녀를 묶어두기, 미신적인 금식재일 준수, 양심을 위한다는 육식차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인간들이 제정한 성인축일 지키기-교황주의자들이 날조 낸 (그들이 명명한) 모든 축제들, 곧 사도/순교자/처녀, 크리스마스, 할례절, 현현절, 정화절, 우리 여주(女主/성모)에 대한 축일들 등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성경에는 이런 것들을 뒷받침하는 아무 명령도 보장/확언도 없으므로, 우리는 본(우리 스코틀런드 교회) 영역 내에서 그것들을 전적으로 철폐하기로 판정한다. 더 나아가 단언컨대, 그런 혐오사항들(abominations)을 고집하여 지키고 가르치는 무리는 시민의회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독자는 보았는가? 위에 따르면, 장로회의 진정한 창설자인 녹스는 천주교에서 유래된 크리스마스 전승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첫째로, 성경에 없는 전통이다. 아무 근거가 없다. 따라서 비성경적이다. 둘째로, 인간이 만든 모순된 인본주의 교리의 일부이다. 교황주의자들이 날조해낸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혐오대상이다. 넷째로, 그래도 고집하는 준수자는 시민의회의 징벌 대상이다.   


충격이 아닌가? 오늘날 현대교회의 성탄절 관행과는 너무나 정반대인 판단이다.


이러한 스코틀런드 신교의 입장은 6년 뒤인 1566년, 공고히 재확인된다. 즉 칼뱅이 죽은 지 약 2년 후 그를 계승한 제네바 개혁가, 테오도르 베자가 녹스에게 서신을 보내어 제2 헬베틱(즉 스위스 신교) 신조에 대한 스코틀런드 총회의 공인을 요청해 왔을 때, 이 신조의 제 24장에 언급된 "우리 주님의 탄생, 할례, 수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축일"에 관하여 "그런 축일은 현재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신적인 계시가 지시해준 것 외에 그 어떤 축일도 감히 종교적으로 축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지적했다.


얼마나 철저한 개혁인가! 이 점에서 녹스는 칼뱅과 제네바보다 훨씬 진일보해 있고, 더욱 성경적, 개혁적인 것이다. 이러니 녹스가 미움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숱한 박해를 받았고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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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런드 교회 총회 (1767년)



녹스의 후예들

-콜더우드의 입장


한편 훗날의 영국 왕 제임즈 1세는 자신의 정치적 유익 때문에 장로교/침례교 등을 배척하고, 성공회 편이 되었다. 1617년 펉(Perth) 총회 때 왕은 성공회를 증진시킬 만한 다양한 축제의식을 추구했는데, 거기엔 크리스마스/부활절/성령강림절/승천절 지키기도 포함됐다. 그러나 데이비드 콜더우드를 비롯한 스코틀런드 목회자들은 이에 강력 반대했다. 

[오늘날 제임즈 성경(KJV)을 유일/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양 숭앙하면서 제임즈 왕까지도 신성한(?) 존재로 덩달아 존중하는 성향이 있는 KJB 유일/우월주의자들이 신교의 성탄절을 맹비판/공격하는 위선성과 자체모순성이 여실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콜더우드는 녹스의 성경적 정신을 이어받아, 1619년에 펴낸 펉 총회 비평문에서 날조된 (스코틀런드 교회에도 준수의무가 부과된) 이 예배행위를 신랄히 공격했다. 그는 성일 준수에 관해 오직 하나님만이 제정할 수 있다며 "(구약적) 기념축일의 신비주의적 용도는 사라지고 도덕적 용도만 유지된다고 해설했다. 나중 추가설명을 하겠지만, '신비적 용도'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크리스마스는 과연 신비주의적/미신적 축제이기 때문이다. 


콜더우드는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의 여러 가지 행위가 여러 예전들을 통해 기려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탄생, 할례, 성전에 나타나심, (요르단 강변) 침례/세례, 변형사건 등등의 날짜를 알려주셨을 것이라며, "12월 25일에 크리스토님이 탄생했다는 견해는 로마에서 비롯됐다"고 바로 집어냈다. 그는 특히 과거에 주님의 탄생 날짜를 달력상으로 다양하게 추정한 서로 모순된 제설을 지적하면서 "옛 사람들이 1월 6일, 또는 4월 19일, 일부는 5월 19일, 기타는 12월 25일을 (탄신일로) 지키는 다양성은 곧 사도들이 결코 제정하지 않았음을 논증해 준다"고 논리적으로 변박했다. 


콜더우드는 더욱 담대히 강변한다:  

"아니오, 우리 진실을 말합시다: 12월-성탄절은 로마 이교도들의 12월-사투르날리아 축제의 모방일 뿐이오. 크리스토님이 아닌 바쿠스(그리스의 디오니소스)가 크리스천들의 하나님인 양 사용돼 왔단 말입니다." 


이것은 성탄절에 대한 매우 올바른 파악이요, 역사적 인식이다. 아마도 현대의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언뜻 "이거 또 어디서 온 이단사설이지?" 정도로 비웃으며 콧방귀를 날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은 이단아들이 아니라 바로 중세개혁의 중심부였던 한 곳에서 나온 말임을 인지하기 바란다.  


콜더우드는 이어서 "우리가 크리스토님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한 날을 지켜야 한다는 발상을 공통적으로 반대한다. 우리는 이미 대답했다. 크리스토님의 날 또는 주님의 날(주일날)이 곧 그 분의 탄생과 그 분의 모든 행적과 혜택들, 아울러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지정된 날이다."


보았는가? 콜더우드는 여기서 주님을 기념함에 관한 매우 성경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 주님의 모든 것-탄생/사역/수난/부활 등 모든 것을 기념하는 날은 평소의 주일날 하루로 족하다는 것이다! 구약 때처럼 딴 특별한 의식적 제일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콜더우드는 천주교에서 지켜져 온 축일들이 철폐돼야 하는 이유는 "그것들은 미신으로 남용되고 오염됐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그의 추론에 따르면, 광야시대의 놋뱀은 본래 하나님의 명령으로 주조됐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올무가 될 무렵 파괴됐는데(왕들B서=왕하 18'4), 하물며 로마 미신과 우상숭배에 추가로 오염된 인위적 관행이라면 우리가 더욱 과감히 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콜더우드는 또 1628년에 펴낸 '목회자와 주교'라는 소책자에서, 목회자가 대표하는 장로교인들과 주교가 대표하는 성당 사람들을 대조하면서, 재차 '성일'에 관해 언급했다. 이 책자의 주인공 격인 목회자는 "안식일(곧 주일날) 외에 사람이 만든 보통 축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어떤 신비에 관해서든, 또는 한 날과 딴 날의 차이에서든, 단지 (말씀 아닌) 전통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그런 축일은 크리스토님과 그 제자들의 교리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천명한다. 반면, 주교측은 자신의 교리와 행습, 모범과 제자훈련에 대한 소홀 끝에 안식일(주일)에 대한 경건한 평가를 하지 않고, (구약적인) 유월절, 성탄절과 기타 인간이 제정한 축일을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이후 수십 년 간 스코틀런드 교회와 국교회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면서도 후자는 천주교에서 넘겨받은 온갖 의식적 미신들을 철폐하지 않고 유지하면서 전자에게 부과했다. 결국 스코틀런드 교회가 이를 강요받자, 군사반란까지 일어난다.  



조지 길레스피


스코틀런드 교회의 주요 신학자로, 훗날 웨스트민스터 신학회의의 스코틀런드 대표였던 조지 길레스피는 1637년의 책 '스코틀런드교회에 강요된 영국 교황주의 의식에 대한 반론'에서 축일 준수를 비롯한 교회예전 문제를 주로 다루면서 네 가지로 반증했다. 첫째로 그것들의 '필요성'을 반박하고, 둘째로 그것들이 '유익'하다는 통념을 구축해 버렸고, 셋째로 그것들의 불법성을 논증하고, 넷째로 그것들의 비중립성을 지적한다. 

  

길레스피는 녹스의 정규예배원리에 의거하여 축일은 성경에서의 긍정적 보장이 결핍됐기에 배제돼야 한다고 갈파했다. 또한 십계명의 제2계명에 호소한다:


   "제2계명은 도덕적이고 영구적이며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 인위적 추가와 발명을 아울러 금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고안해낸 성축제일 의식 등은 제2계명이 금한 우상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는 또 갈라티아서 4'10, 콜로새서 2'16에 근거하여 구약적인 의식 제전들이 지나간 시대의 것임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과거 몸소 제정하신 그런 영예로운 날들은 영예롭게 매장될 것이었다...파울(바울)이 하나님이 과거에 친히 제정하셨던 그런 축일들의 준수를 단죄했다면, 하물며 인간이 짜낸 그런 축일들의 준수야 오죽 단죄하지 않겠는가."


길레스피는 축전의식들의 미신적이고 부패한 뿌리를 간파하면서, 우상숭배의 모든 잔재들을 제거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를 성경구절로 입증하고 있다(미쯔라임출국=출 34'13, 민수기 33'52, 신명기 7'5,25,26; 12'2,3, 예샤야후=사 30'22). 


성탄전통 지지자들은 축제의식 자체가 아니라 축제일의 남용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했으나 길레스피는 이 의식이 하나님의 제정 때문이라는 필요성이 입증될 수 없는 이상 완전히 제거돼야 마땅하다고 변박했다. 


"따라서 바쳐진 성체(빵) 앞 무릎 꿇기, 십자가 형상들, 제의(=성직자복), (성탄절을 포함한) 축일, 주교제, 제단 앞 무릎꿇기, 사적인 장소에서의 '성사' 등은 로마의 작품이고 바벨론의 보따리, 기생의 장신구이며, 천주교의 배지, 크리스토님의 적들의 상징, 적 크리스토의 트로피이니, 우리가 그런 데 순응할 수도, 우상숭배적인 교황주의자들과 함께 소통할 수도, 어울릴 수도 없고, 그들에게 동참함으로써 우리들까지 우상숭배자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오."


길레스피의 말이 현대교회로서는 과도해 보일는지 모르나, 확실히 교황주의는 그런 문제들이 있어왔다. 길레스피는 특히 성당 같은 제도교회가 축제일 따위를 '거룩한 계절'과 '거룩한 날'로 만들 수 있는 권한과 권능이 없음을 명시했다. 


그는 또 그런 성당 예전들이 성사처럼 돼 가는 데 우려를 표명했다. 신도들에게 성당의식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신비스럽고 상징적이고 효과적인 교사들로 착각되기 때문이다. 축제일의 상징적/교육적인 면모는 인위적이고 거짓된 '성사'들로 만들어간다. 

길레스피는 또 그런 '거룩한 절기'들이 주일날 자체보다 중시되는 성향을 우려했다. 


"어떤 축일의 준수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념하기보다 다른 용도이다. 크리스마스 축제성일은 크리스토님의 탄생 기념보다는 바카날리아(바쿠스=디오니소스 신의 축제)에 더 가깝다."



스코틀런드에서는 1618년 제임즈 6세가 '성탄절 준수'를 명했으나 실제 신도들의 교회 참석은 뜸했다. 



블러그 <진리와 사랑>에서 퍼 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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