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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 158]
본문 : 신 30장 11-14절
제목 :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일시 : 2021.09.01.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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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 158]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명기 30장 11~14절)


율법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가지고 있을까요?

지극히 율법적이고 경직된 태도와 자세에 매여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는 반면, 반율법주의적인 혹은 율법폐기론적 입장에 서서 율법을 무시한 채 방종에 치우친 자유분방하고 경망 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것입니다.


유대주의자 가운데 회심한 그리스도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서로 갈등한 문제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유대주의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모습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보여주는 다소 방종처럼 보이는 신앙의 모습은 서로의 관점에서 충돌하고 갈등하며 대립하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서신서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둘 사이를 중재하며 로마서 15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리고 같은 장 7절에서는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직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앙을 가진 자들의 연약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자신의 신앙을 고집함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라고 바울은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용납하고 품어주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교리는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지한 자를 정죄하고 그것을 지적하고 압박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지식이 있는 자는 무지한 자를, 신앙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담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로 우리는 율법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접근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진 지식을 사용한다면 모두가 상처를 입게 되고, 서로 정죄와 판단과 비방을 하게 되며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깨지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율법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 하시는 지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 율법을 지켜 행하는 정신에 무엇이 필요한지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초대교회에서 유대주의 출신의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 한 교회를 섬기면서 겪어야 했던 그 갈등이 언제든 재현되고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봅시다. ‘왜냐하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명령은 너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고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거나 매우 난해해 그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특징에 대해 그렇게 어려운, 감당키 힘든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도무지 그것을 이룰 수 없고 순종할 수 없으며 지켜 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율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12~13절에서 이에 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하늘에 있지 않다.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그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 그것을 우리에게 들려줄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 너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 너머로 건너가서 그가 그것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올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할 것이다.’

은유적으로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도저히 도달하기 힘든 하늘이나 바다 끝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의도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은 결코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수준이나 내용이 아니라고 치부하여,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 이 땅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2장 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율법은 이제 우리를 단죄하고 우리를 절망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 드러난 우리의 죄를 핑계하지 못하게 하며, 항상 성화되어가야 하는 우리의 삶을 채찍질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복음의 의미가, 우리를 위해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복음에 대한 선명한 이해와 체험이 결여된다면, 당연히 힘써 율법을 지키는 그 성별 된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당위도 희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복음의 의미가 깊이 각인 되지 않은 상태의 영혼에게 율법적인 행위만을 강조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끊임없이 정죄감에 시달리게 되고 죄와 율법에 대한 강박을 갖게 되므로, 신앙의 진정한 의미인 자유와 마음의 평강 대신 언제나 강압과 죄책감과 자기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연약함을 도우시고, 율법에 담긴 그 깊은 의미와 교훈과 원리를 깨닫게 하여 그것을 자발적인 의지로 기꺼이 지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는 자에게 ‘이것을 지켜라, 지키지 마라, 행하라, 행하지 마라’ 하는 식으로 신앙을 주입하고 그렇게 지키는 것을 신앙의 안위로 삼게 만드는 것은 지극히 신앙을 그릇된 방식으로 가르치는 일이며 중대한 신앙의 오류를 범하는 문제가 됩니다.

율법주의적인 잣대와 기준을 가지고 그것에 얽매여서 신앙을 출발하게 하는 일은 결코 올바른 신앙과 구원에 안착하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신앙이 올바로 세워지지 않는 많은 경우들 가운데는 이렇게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관점으로 지키고 지키지 않고의 프레임에 갇혀 자유 함과 자발적인 마음 없이 스스로를 규범에 가둠으로써 신앙이 자라지 못하거나 혹은 기형적으로 자라게 되는 일들이 초래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그는 율법을 지키면 그것을 만족해 하고 지키지 않으면 불안해 합니다. 혹은 타인을 정죄하는 신앙에 빠지는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의 신앙은 결코 자유 함이 없고 나아가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임의로 간과하게 되어 결국 신앙이 자기 중심적 자기 합리화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에 머물게 됩니다.


그럼 참된 신자는 율법에 대해 어떤 관점과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말씀은 너에게 매우 가까운 네 입과 네 마음에 있다 그것을 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율법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히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고 네 입과 네 마음에 있다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율법은 이렇게 온도 차가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하사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그들을 정죄하고 그 죄값을 물어 모두 죽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율법이라는 도구를 통한 약속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 아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삶으로 하나님과 더욱 깊이 교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대해 말씀은 ‘네게서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네 마음에 있다고, 네가 충분히 행할 수 있다’ 고까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왜 하나님의 율법이 이토록 멀고 무겁고 힘겹게 여겨지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아는 일도 이것을 실천하는 일도 이토록 버겁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그 바탕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극히 미약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나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시간이라 절대로 늦을 수 없는 어떤 일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너무 만나고 싶기 때문에 기꺼이 즐거움과 설렘으로 그를 만나러 나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소중한 시간이라면 그 시간에 결코 늦지 않을 것이고 그 장소에 일찍 도착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께 향한 모든 일들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일은 우리에게 버겁고 힘들고 마지 못해 해야하는 의무로만 여겨질 따름입니다. 하지 않았으면 눈치를 봐야 하고 무엇인가 무거운 의무감에 눌려 억지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혹은 대수롭지 않게 일찍 가든 늦게 가든 만나든 만나지 않든 그런 가벼운 문제 정도로 여길 것입니다. 참으로 제일 어려운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사랑하지도 그 대상이 내게 제일 중요하지도 않고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하지 않은데 가야 하고 만나야 하고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일들이 무겁고 힘들고 멀리 느껴지고 내 입과 마음에서부터도 소멸될 것입니다. 그 일을 결코 하고 싶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지체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일, 성경을 배우고 묵상하며 교리를 배우는 일, 교회 직분이나 직책을 받아 섬기는 일, 성도를 돌아보는 일은 모두 기쁘고 즐겁게 자원해서 기꺼이 할 수도 있지만, 하는 수 없이 마지 못해 혹은 다른 동기와 목적으로 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율례와 법도와 계명은 우리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 심히 가까우며,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어 기꺼이 이 모든 것을 행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그 사랑의 대상에 얽매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꺼이 지켜야 할 모든 도리와 신뢰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의 원동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 이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율례와 법도의 중심입니다. 사랑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고 지체를 향한 사랑도 없는 율법의 지킴은 그야말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율법주의에 경도된 신앙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율법을 기꺼이 지키며 우리가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동기로서, 복음을 통해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을 따라 행할 능력과 그 자발적 동기는 바로 복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슴에 십자가에 대한 사랑도 그 감격도 없는 사람이 율법적으로 어떤 것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유대주의와 도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사랑도 없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증스럽게 여기듯이 진정으로 십자가를 통해 구속하신 그 은혜에 대한 감격도, 확신도 없는 사람에게 계명과 법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가르침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특권과 영광을 받은 사람에게 그에 대한 자발적인 보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멀리 있고 지켜 순종하기에 너무 무겁고 힘겨운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율법적인 순종을 강요하거나 그것을 강조하기 이전에 복음을 먼저 깊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교회를 처음 다니게 된 성도에게 주일 성수를 강요하고 헌금과 봉사와 헌신을 강조하면서 신앙에 있어 마땅히 요구되는 어떤 의무 만을 강조하게 되면 둘 중 한가지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라 하니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지키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는 심한 정죄 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전혀 신앙의 동기나 이유가 없는데도 어떤 행위를 강요 받음으로 인해 신앙이 그렇게 힘든 것이라면 포기해 버리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것을 사모하고 언제나 내 입과 마음에 두며 그것을 능히 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은 십자가의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내 영혼이 충만할 때임을 부디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복음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있어 그 구원에 대한 감격과 기쁨과 내세에 대한 소망과 확신으로 충만할 때 신앙의 모든 거룩한 의무와 책임들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내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속하신 그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언제나 우리의 영혼 깊숙이 각인 되어 있어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부인하며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지고 믿음의 길, 그 좁은 길을 오직 주만 바라보며 묵묵히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지켜 행하라 명하시며 율법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율법을 지켜 행하는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멀리 있고 너무 힘겨우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죄책감에서부터 결코 자유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우리에게 먼 것도 되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일방적 당위가 아니라, 복음 앞으로 십자가 앞으로 더 깊이 다가가 우리의 뺨과 가슴이 그 대속한 은혜에 대한 형언할 길이 없는 감격의 눈물로 적시어 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 해야 하는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아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성경을 통해 목사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된 길로 필요 없는 멍에를 매고 힘겹게 그 길을 가게 되거나 혹은 모든 거룩한 신앙의 의무들을 다 집어 던져 버리고 천박한 신앙과 삶으로 치우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율법을 기꺼이 지켜 행하는 삶은 그 너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그것을 보기 원하시고 그 모습을 진정으로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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