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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

2014.11.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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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백스터는 1615년에 슈롭셔의 슈루스버리 근교의 로우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도박습관과 물려받은 빚, 어머니의 병 때문에 리처드는 생의 처음 10년을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독서와 연구에 매진했던 그는 오랜 병고의 기간과 다양한 책들 특히 윌리엄 퍼킨스의 전집과 리처드 십스의  <꺼져 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의 회복> 에제키엘 컬버웰의 <신앙론> 등의 작품들로 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633년 백스터는 찰스 1세의 왕실의 연회장이었던 헨리 허버트 경으로부터 성직 수임을 받아 런던으로 향했다.

1641년 백스터는 키더민스터의 목사가 되었다. 키더민스터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백스터의 강력한 설교와 주의 만찬에 대한 엄한 통제와 교회치리 등에 반발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백스터의 17년의 사역은 상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나는 사람에게 하듯' 설교했으며 이는 성령의 강력한 역하심에 힘입어 수많은 회심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1647년 질병 가운데서도 그는 <성도의 영원한 안식>을 집필했다.

그는 매주 이틀씩 교인들에게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했고 각 가정을 방문하여 가정마다 한 시간 정도 교육을 실시하곤 했다.

이러한 가정을 방문하여 교리를 가르친 일들로 인해서 많은 회심이 일어났고 회중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서 백스터의 사역 말미에는 거의 모든 성도들이 가정 예배를 드리게 되어 거리를 지나가면 수백 가정이 시편 찬송을 부르며 백스터 목사님의 설교의 내용으로 깊은 나눔을 갖는 소리들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1662년 백스터는 통일령으로 영국 국교회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후 50세가 가까이 되었을때 그는 성도 중에 한명이었던 20대 초반에 마거릿 찰튼과 결혼을 했다. 

백스터는 런던에 정착했는데 고위 성직자들과 관료들은 백스터의 사역 속에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설교 때문에 그는 세차례나 투옥이 되었고 그의 모든 저술은 압수 당했다.

백스터는 결국 윌리엄과 메리가 비국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1689년의 관용령의 부혜를 입게 되었고 그의 말년은 차터하우스 광장의 안락한 환경에서 보내며 설교와 저술에 몰두했다.


1691년 12월 8일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그는 150편의 논문을 썼고 미발표된 몇백 편의 서신과 글을 남겼다.

백스터의 작품들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특이한 혼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작정, 속죄, 칭의의 교리에 있어서 결코 개혁주의 적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는 몇몇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대체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개혁주의 라인을 따라 형성하기는 했지만 매우 자주 아르미니우스적 사고에 기울어지고도 했다.

그는 아미랄두스주의자들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정적 일반 속죄론을 포함하는 그들의 사상에 자신의 생각을 조합시켰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가정적으로 돌아가셨지만 그의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실제적 유익을 준다는 가르침이었다.


칭의의 교리에 대한 백스터의 접근법은 신율법주의라고 불린다. 그는 하나님이 옛율법을 깨뜨린 것을 회개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제공하면서 새로운 법을 주신다고 말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이 새로운 율법은 믿음과 회개인데 이는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에 의해 유지되어 신자 자신의 개인적이고 구원을 얻는 의로움이 된다.

따라서 백스터의 구원론은 아르미니우스적인 새로운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더한 아미랄두스적인 것이다.

당행히도 이 잘못된 교리들은 그가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기보다  성화를 촉구하기 위해 주로 작성한 경건 문헌들에는 표면적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회심>  <천국을 준비했는가>  <참된 목자>  <성도의 영원한 안식> <리터드 백스터의 실천적 작품들> 이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