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21:02
[요한일서 강해 4] 요한일서 강해 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요한일서 2장 1~6절>
진리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고 피상적이 될 때 신앙의 내용과 그 삶의 모습도 지극히 형식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순과 불일치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무지와 지식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혼란인 것이다.
그러면 지식만 있으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가.. 말씀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변화시킨 듯 하지만 다시 죄의 본성 아래로
돌아가 버리기 마련이다. 근본적으로 진리가 영혼에 와 닿고 그 심오한 깨달음과 은혜가 마음을 갈아 엎어 변화 시킬 때만이 신앙의 거룩한 변화와 진보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영혼속으로 진리가 깊이 스며들도록 돕는 것은 바로 고난이다. 영혼의 곤고함이며 고독이고
절박함이다. 가난하고 절박한 마음이 더욱 진리가 영혼 속으로 깊이 심기워지는 길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어긋난 뼈를 다시 맞추실 때 고난을 사용하시고 고통을 이용하시는 것이다.
또한 무엇이 바른 믿음인지를 더욱 선명하게 세우고 그것을 견고히 지켜 나아가게 하시는 방편으로서 이단의 역사를 허용 하시고 이단의 도전을
용납 하시는 것이다. 이단이 일어날 때 진리는 더욱 정교 해지고 교리의 논리는 강화되며 더욱 강력하게 진리가 성도들과 교회에 선포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도 영지주의 이단에 교회가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진리가 흔들리니 성도의 유대가 무너지고 성도의 사랑의 교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위기는 또다른 기회를 만들어 내듯이 하나님께서 초대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기회 삼아 다시 복음이 힘있고 올바르게 전해지고 그 복음이 바로
세워짐으로 인해서 성도간의 무너지고 있는 사랑이 더 견고하게 세워지고 뜨거워지는 계기를 만들어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는 7절에서 이렇게 이어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로운 계명을
너희에게 쓰지 않는다. 도리어 처음부터 너희가 소유하고 있었던 오래된 계명을 쓴다. 오래된 계명은 너희가 들었던 말씀이다.’
사도가 강조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지금 처음 듣는 생소한 말씀이나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줄곳 강조되어 왔던 말씀이라고 밝히고 있다. ‘처음부터 가진 계명’이고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라고 사도는 표현한다.
사랑에 대한 계명은 구약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전혀 이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님을 사도는 설명하고 있다. 무엇인가 다른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익히 알아왔고 들어왔던 그 계명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도는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면 왜, 어떤 의도 때문에 이렇게 사도는 이미 성도들이 알고 있는 그 계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알고 있는 그 계명을 어찌하여 지금은 그대들이 그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반문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까지 알고 있고 지켜 왔던 이 위대한 가르침을 교훈을 그대들이 거부하고 있는지를 사도는 묻고 있었던 것이다.
영지주의 이단 사상은 신앙의 기형을 가져왔다. 성도의 삶에 심각한 변질과 변형을 가져온 것이다. 서로 사랑하며 섬겨야 할 지체들이 이단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진리가 간곡하게 말씀하고 있었던 서로 사랑에 대한 대의를 저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진리를 붙들과 바른 믿음을 지키고 있을 때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가 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이 침투해 들어와 교회와 지체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게 되자 잘 지켜지고 유지되던 사랑과 연합의 관계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급격히 관계들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진리가 무너질 때, 말씀이 변질될 때 성도간의 사랑도 무너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익숙하게 알고 믿어왔던 올바른 진리의 가치들이 흔들릴 때 성도의 가정과 공동체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진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날마다 새로운 발견이고 그 말씀이 더욱 우리의 인생과 삶 속에서 깊이 체화되는
것이다.
진리에 깊어지지 않을 때 진리의 깨달음에 대한 지속적인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결국은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는 일들이 초래되는 것이다. 더욱 깊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가 넓혀지지 않을 때 성도는 신앙에 실증과 권태를 느끼게 되고 그러던 차에 이단적이고 비진리의 미혹에
노출되게 되면 바른 신앙을 떠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이다. 진리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익히 알아오던 그 말씀 속에서 더 깊은 은혜를 더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나의 삶을 교정하려 해야지 어떤 새로운
다른 진리, 다른 신앙, 다른 믿음의 길을 모색하다가 결국은
잘못된 신앙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계명 새로운 진리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호와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다만 그 말씀 앞에서 내가 내 마음과 영혼이
바뀌어지는 것일 뿐이다. 늘 듣던 말씀이 새롭게 들리고 깨달아지고 가슴에 와 박히면서 눈물이 터져나오게 만드는 그 말씀이 그렇게 날마다 새롭게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전혀 새로운 느낌과 깨달음으로 마음에 와 닿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당연히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어지는 8절을 보라. ‘내가 다시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쓴다. 그것은 그분 안에서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진실하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된 빛이 이미 빛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은 앞 에서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계명’ 이라고 말하고 다시 본 절에서는 앞절과 모순이 되는 것처럼 새 계명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동일한 계명에 대한 또 다른 묘사를 표현한 것이다. 이 새로운 계명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그리스도께도 너희들에게도 모두 참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율법의 어두움이 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참된 빛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사도는 말한다. 새 계명은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수신자들안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을 영원한 사망에서 건져 내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앞에 서기 전까지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유대주의 우월사상에 사로 잡혀 그렇게 살았던 자들이지만 복음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