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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4]
본문 : 요일 2장7-11절
제목 :'빛 가운데 있다하며'
일시 : 2015.12.30 수요기도회
* 컴퓨터 문제로 녹음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교안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님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요한일서 강해 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요한일서 2 1~6>

 

진리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고 피상적이 될 때 신앙의 내용과 그 삶의 모습도 지극히 형식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순과 불일치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무지와 지식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혼란인 것이다.

 

그러면 지식만 있으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가..

말씀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변화시킨 듯 하지만 다시 죄의 본성 아래로 돌아가 버리기 마련이다.

근본적으로 진리가 영혼에 와 닿고 그 심오한 깨달음과 은혜가 마음을 갈아 엎어 변화 시킬 때만이 신앙의 거룩한 변화와 진보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영혼속으로 진리가 깊이 스며들도록 돕는 것은 바로 고난이다. 영혼의 곤고함이며 고독이고 절박함이다.

가난하고 절박한 마음이 더욱 진리가 영혼 속으로 깊이 심기워지는 길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어긋난 뼈를 다시 맞추실 때 고난을 사용하시고 고통을 이용하시는 것이다.

 

또한 무엇이 바른 믿음인지를 더욱 선명하게 세우고 그것을 견고히 지켜 나아가게 하시는 방편으로서 이단의 역사를 허용 하시고 이단의 도전을 용납 하시는 것이다.

이단이 일어날 때 진리는 더욱 정교 해지고 교리의 논리는 강화되며 더욱 강력하게 진리가 성도들과 교회에 선포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도 영지주의 이단에 교회가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진리가 흔들리니 성도의 유대가 무너지고 성도의 사랑의 교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위기는 또다른 기회를 만들어 내듯이 하나님께서 초대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기회 삼아 다시 복음이 힘있고 올바르게 전해지고 그 복음이 바로 세워짐으로 인해서 성도간의 무너지고 있는 사랑이 더 견고하게 세워지고 뜨거워지는 계기를 만들어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는 7절에서 이렇게 이어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로운 계명을 너희에게 쓰지 않는다. 도리어 처음부터 너희가 소유하고 있었던 오래된 계명을 쓴다. 오래된 계명은 너희가 들었던 말씀이다.

 

사도가 강조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지금 처음 듣는 생소한 말씀이나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줄곳 강조되어 왔던 말씀이라고 밝히고 있다.

처음부터 가진 계명이고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라고 사도는 표현한다.

 

사랑에 대한 계명은 구약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전혀 이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님을 사도는 설명하고 있다.

무엇인가 다른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익히 알아왔고 들어왔던 그 계명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도는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면 왜, 어떤 의도 때문에 이렇게 사도는 이미 성도들이 알고 있는 그 계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알고 있는 그 계명을 어찌하여 지금은 그대들이 그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반문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까지 알고 있고 지켜 왔던 이 위대한 가르침을 교훈을 그대들이 거부하고 있는지를 사도는 묻고 있었던 것이다.

 

영지주의 이단 사상은 신앙의 기형을 가져왔다. 성도의 삶에 심각한 변질과 변형을 가져온 것이다.

서로 사랑하며 섬겨야 할 지체들이 이단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진리가 간곡하게 말씀하고 있었던 서로 사랑에 대한 대의를 저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진리를 붙들과 바른 믿음을 지키고 있을 때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가 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이 침투해 들어와 교회와 지체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게 되자 잘 지켜지고 유지되던 사랑과 연합의 관계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급격히 관계들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진리가 무너질 때, 말씀이 변질될 때 성도간의 사랑도 무너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익숙하게 알고 믿어왔던 올바른 진리의 가치들이 흔들릴 때 성도의 가정과 공동체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진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날마다 새로운 발견이고 그 말씀이 더욱 우리의 인생과 삶 속에서 깊이 체화되는 것이다.

 

진리에 깊어지지 않을 때 진리의 깨달음에 대한 지속적인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결국은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는 일들이 초래되는 것이다.

더욱 깊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가 넓혀지지 않을 때 성도는 신앙에 실증과 권태를 느끼게 되고 그러던 차에 이단적이고 비진리의 미혹에 노출되게 되면 바른 신앙을 떠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이다.

진리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익히 알아오던 그 말씀 속에서 더 깊은 은혜를 더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나의 삶을 교정하려 해야지 어떤 새로운 다른 진리, 다른 신앙, 다른 믿음의 길을 모색하다가 결국은 잘못된 신앙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계명 새로운 진리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호와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다만 그 말씀 앞에서 내가 내 마음과 영혼이 바뀌어지는 것일 뿐이다.

늘 듣던 말씀이 새롭게 들리고 깨달아지고 가슴에 와 박히면서 눈물이 터져나오게 만드는 그 말씀이 그렇게 날마다 새롭게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전혀 새로운 느낌과 깨달음으로 마음에 와 닿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당연히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어지는 8절을 보라.

내가 다시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쓴다. 그것은 그분 안에서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진실하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된 빛이 이미 빛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은 앞 에서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계명 이라고 말하고 다시 본 절에서는 앞절과 모순이 되는 것처럼 새 계명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동일한 계명에 대한 또 다른 묘사를 표현한 것이다.

이 새로운 계명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그리스도께도 너희들에게도 모두 참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율법의 어두움이 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참된 빛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사도는 말한다.

새 계명은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수신자들안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을 영원한 사망에서 건져 내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앞에 서기 전까지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유대주의 우월사상에 사로 잡혀 그렇게 살았던 자들이지만 복음안에서  십자가 아래서 이제 모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그렇게 어두움이 지나가고 빛이 도래 했는데

왜 다시 어두움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인지를 사도는 깊이 탄식하면서 이단 사상에 물들어 사랑을 잃어 버린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 시키고 있었다.

 

이미 얻은 구원이며 영생의 소망이지만 이 참된 은혜 안에서 진정한 영혼의 희열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이 은혜를 갱신 해 나아가지 못하면 성도는 또다시 미혹을 당하게 되고 비진리에 현혹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그 가치를 알고 그 진리 안에 날마다 거하며 그 진리의 샘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은혜에 목을 적시는 자의 영혼을 보전하고 붙들어 준다.

 

이미 진리 안에서 있고 진리를 맛보고 깨달았더라도 그 진리 안에 거하며 그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지금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진리의 가치는 소멸되어 버리고 사랑은 식어지고 깨어지게 되는 일들이 성도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이 빛과 진리 안에 거했으나 뒤로 물러가 일시적으로 사랑이 식어진 신앙이 있는가 하면 빛 가운데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진리안에 거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여전히 진정한 빛 안에 거하지 않았던 사실이 탄로나게 되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9절을 보라.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그의 형제를 싫어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 가운데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빛에서 물러난 사람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성경은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기를 그런 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그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믿는 자들이라고 설명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빛 가운데 있다고 굳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두번째 특징은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 반대는 사랑하지 않는 것, 무관심 한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 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사람들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으면서도 변명하기를 미워하지 않아요 다만 잊었을 뿐입니다. 또 그에 대해서 아무런 마음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라는 답변으로 애써 미움의 감정을 숨기고 미움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미움이 없는 것일까..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이다.

그 미움을 숨기는 것일 뿐이다.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부단히 노력한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보라. 그 사랑은 그냥 그 대상에게로 쉬임없이 부어지는 내려가는 사랑이다.

사랑하려고 노력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이 가는 것이다.

결혼하기 이전에 사랑하는 애인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그 대상을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사랑도 있다.

상처를 많이 주신 부모님을 사랑하는 일, 이미 결혼을 해서 이제 많은 허물과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들을 배우자에게서 발견하고 난 이후에는 이제 사랑은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사랑으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랑으로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사랑하지 않아도 되고 무관심해도 되는 사랑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하지 않는 미워하는 마음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 아무런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데 있는 자일 뿐이라고..

 

빛 가운데 있다고 믿었지만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미워하고 있는 것이고 그 미움의 문제를 놓고 그 사랑할 수 없는 내 안에 인간의 한계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있는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렇게 계속 이 문제를 방치하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진리의 빛, 복음의 빛, 구원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성도는 거룩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즉 우리 안에 사랑하지 않으려 하고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 되지 않으려는 죄성, 그 죄의 정체를 혐오하고 미워하며 주의 은혜를 통해 그 사랑의 능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할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능히 사랑하게 하고 용납하게 하시는 그 능력을 의지해서 할수 없다고 포기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은혜로 말미암아 말씀이 살아내라고 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거룩한 몸부림을 쉬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렇게 우리를 빚어 가시고 성장시켜 나아가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연적인 아픔과 시련을 주셔서 우리를 넓혀 나아가시는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우리에게 맡겨 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부딪히게 하시면서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랑할 능력을 구하며 사랑하고자 하는 자라야 그가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이다.

그 은혜와 능력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대로 포기해 버리고 여전히 미움 가운데 묶어 놓기를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사람일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10절과 11절을 보라.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머무른다. 그리고 그의 안에 장애물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가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 그리고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 왔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그의 눈들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만이 빛 가운데 머무는 자이다.

그가 빛 가운데 머물기를 기뻐하기 때문에 그 빛으로부터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할 능력을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전열 기구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전기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아야 빛을 내기 마련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 조차도 사랑할 수 없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죄인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영혼을 꽂아 넣고 그로부터 힘을 얻을때 우리는 능히 형제를 사랑하며 그 어떤 사랑하지 못할 장애물도 넘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의 그 풍성하신 사랑안에 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꾸 사랑할 수 없는 우리 안에 있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그것을 트라우마라고 하고 성경은 쓴뿌리 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계속 우리의 마음을 덮고 그 사랑의 약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치료할 때 우리에게 상처 라는 단어는, 날마다 나는 상처 받았다고 말하는 넋두리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상처 덩어리인 나의 힘으로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겨야 한다. 그 위대하신 사랑이 나로 하여금 나의 모든 상처를 치료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게 하시는 능력으로 다가오게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어떻게 지금의 나의 모습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내 안에 장애물을 뛰어 넘어 사랑할 수 있겠는가..

간절한 기도와 그리고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며 진리의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 주시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어도 그 말씀 속에 잠기지 않고 깊은 기도에 영혼이 담겨지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전혀 이해되지 않고 경험되지 않는 건조한 느낌으로 일관될 뿐이다.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어 내려갈때 그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찾아오시는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이 나를 무너뜨리고 나의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며 쓴뿌리들을 캐 내고 종양을 도려내며 새상이 돋게 하고 충만한 사랑이 차 올라 능히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깊이 기도할 때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허물과 너의 옹졸함을 보게 함으로 나를 고쳐 주시기를 눈물로 가슴을 치며 기도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머리로만 믿는 종교가 아니다.

무릎과 눈물로 믿는 종교이다.

충혈되 눈으로 눈물을 닦으며 또 말씀을 읽어 내려라고 말씀을 읽다가는 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그렇게 되어야 우리의 영혼의 모든 독소가 빠져나가고 모든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장애물들이 모두 치워지게 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없다.

죽을것처럼 사랑해서 결혼해도 싸우고 이혼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도 한계가 있다.

모든 인간의 사랑은 어려운 걸림돌 안에 있다. 겹겹의 장애물 속에 막혀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 만의 노력으로 사랑하려 하고 행복해지려 하다.

이루어질 수 없다. 그 장애물들을 치워주셔야 한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자들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의 길을 찾고 그 장애물을 치워주시는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리에 있을 뿐인 자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 문제를 해쳐 나와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어떻게 그 모든 갈등의 관계를 사랑할 수 없는 그 분노와 증오의 관계를 풀어 해쳐 나올수 있을지 그 길을 찾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빛을 찾지 않는 그들이 고집하는 그 죄의 어두움이 모두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십자가의 은혜가 없는 죄인들의 마음은 불꺼진 칠흑같이 어두운 지하실 같고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얼음창고 같을 뿐이다.

결코 그 어두움 속에서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사랑할 길을, 용서할 길을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깨어짐의 아픔 속에서 하나 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환경을 원망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끝내는 것이다.

깨어진 관계 그대로를 방치한 채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며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지 모른채로 정처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자들이 신자라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바른 진리 안에 거하지 않고 자신을 진리로 그 사랑으로 돌이키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는 자신 안에 자신을 가두어 두려 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길을 찾으려고 빛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려 하지 않는데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당시 초대교회는 영지주의 이단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사람은 그렇게 미워하며 살수 밖에 없으니 포기하고 자신의 영혼만 잘 관리하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허무맹랑한 거짓 복음에 미혹되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눈이 멀고 마음이 어두워져 신자라고 하면서도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도 미워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며 영원히 형제를 보지 않고 살려고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는 이것을 경계하면서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그런 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가 결코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기 싫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는 복음은 없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사랑함으로 빛 가운데 있음을 증명하라고 말씀한다.

뒤집어 말하면 빛 가운데 거하고 빛의 능력을 받아 사랑하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이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는 영원히 결별해

이것은 세상의 논리이다.

 

성경은 어두움에서 나와 빛 가운데 거함으로 그 빛이 주는 능력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대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빛 가운데 머물고 있고 빛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가운데 있으며 그 죄의 어두움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고 그 마음의 장애물을 옮기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어두움 속에 있다면 결코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의 목적지 귀착지가 불확실한  방황하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빛 가운데 나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통해서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빛 안에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의 목적을 올바로 지향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보면, 죽음이 다가오면 깨닫게 된다.

내가 올바로 인생을 살았는지 방황하며 의미없이 무가치한 인생을 살았는지 그 때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빛의 은혜를 그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하는 이 밤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삶이 바른 믿음 위에서 진실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인생 되기를 기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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