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1 08:09
사도는 이미 구원받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지만 그것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고난과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측량할 수 없을 만큼의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그 풍성하신 사랑을 맛보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주제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힘겹고 지치게 되든지 우리가 결코 놓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결코 피곤하고 분주하다는 이유로 언제나 핑계하고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알고 발견하고 깨닫기 위해서 나에게 열어 주신 은혜 베풀어 주심의 기회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이 바로 그것을 알기를 원하고 그것을 알고 경험하는 자리에 있기를 그 무엇보다 더 바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것으로 강화되고 확고해지지 않습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날 신앙의 관성을 따라 습관적으로 교회만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그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박제된 생명체를 보십시오. 살아있는 동물과 매우 흡사하나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화석을 보십시오. 살아있었다는 흔적만 있을 뿐 생명의 힘과 모습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보이지 않는 빈껍데기 같은 믿음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속에 그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증오와 미움, 반목과 무관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아야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며 나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자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풍성하신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가고 경험해 나아가는 긴 시간이 바로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얼마든지 우리의 지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가늠하는 지식으로 도저히 깨닫거나 이해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토록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조건 나에 대해서 참아 주시는 사랑이고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려 주시는 사랑이며 나의 모든 허물들을 덮어주시는 사랑이어야만 한다고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은 때론 우리에게 채찍질하시는 사랑이며 우리를 책망하심으로 그 앞길을 가로막으시는 사랑이며 우리에게 뼈아픈 실망과 실패를 경험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병상에 던지시고 때론 오랜 침묵의 기다림을 요구하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사랑이 어떤 식으로 그 자녀들에게 전달되건 간에, 비록 우리가 고난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을지라도 그런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조금도 흔들리거나 변치 않으시는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결코 가변적이지 않으시며 그 사랑은 결코 부족하거나 모자라지 않으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랑 그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성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처럼 애를 쓰셔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허물과 부끄러움 때문에 아주 작은 사랑만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길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흘러 넘치는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알고자 하고 그 사랑을 맛보고자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향할 때 주님께서는 그 미묘한 우리의 마음의 변화에도 즉시 그 사랑을 부어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발걸음에 크게 힘을 보태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은 예수님에게 가장 넘치는 그리고 그분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속성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