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설교 한토막>
어떻게 신앙이, 신앙의 모든 행위가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풍조가 달라졌다는 이유로 변질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며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변질된 신앙도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까..
안타까운 현실은 이 시대에는 더이상의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한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변질이었습니다.
성찬예식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좇지 않고 자기들이 편의에 따라서 가진 자들이 가지지 않은 지체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으며 자기들 마음대로 성찬의 예식을 더럽힌 것이 바울이 이같이 그들의 그릇된 신앙을 질타했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는,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이라 여기는 인간 중심의 신앙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판단과 결정들, 결국 그러한 일들이 신앙에서 독버섯 처럼 퍼지고 그로 인한 죄악이 먼지처럼 쌓여 영혼에 누적될 때 신앙은 성경에서 멀어지게 되고 현저히 그 믿음은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중심이 되지 않을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매일 우리의 삶에 일부가 되지 않을 때 믿음은 결코 자랄 수 없습니다.
아니 자라기는 커녕 심각한 퇴보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중심이 되는 신앙이 아니라 인간이 그 중심이 되어버리는 신앙으로 지독한 변질과 타락으로 신앙은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그 결연함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그것을 지키려면 주께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받았는지를 기억해야 하며 그것에 우리의 영적인 주의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우리의 사유의 주된 주제 가운데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배제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삶의 상황과 형편 속에서 그것을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며 주님과 대화하며 교제하는 일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창고에 넣어두었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을 가끔씩 먼지를 털어 꺼내 보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유와 묵상과 그리스도를 성경의 진리 속에서 대면하는 일들이 신자에게 그렇게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성경의 지식과 진리들은 신자에게 결코 낯선 영역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영혼의 가장 주된 관심이며 생각과 사유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들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닫음에 있어서 오늘도 주의 은혜 가운데서 주의 교훈과 지혜를 생각하며 하루를 살고 또 그렇게 오늘을 보냈는지를 생각하는 일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에, 일주일 중에 얼마나 자주 혹은 정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계획과 그 내용을 그리스도 위에 포개어 보고 있습니까..
바울은 성찬의 모든 예식은 오직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생각에 맞추어 내 계획에 맞추어 짜 내려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중심을 맞추고 주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내게 뭐라고 말씀하실지를 언제나 묻고 그 뜻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며 그 뜻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께 받은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며 그 삶의 내용과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성찬을 제정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권한이십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교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세례와 성찬만이 성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외에 다른 것을 성례에 혹은 그와 준한 어떤 것에 포함하거나 새롭게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말씀과 성례 이외에도 은혜의 다른 수단이 있다고 믿거나 그것을 추종하는 것은 주께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삶의 환경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신앙의 길을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하고 우리의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영적인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영적으로 더욱 부패하고 타락해 가는 시대 속에서 이제 교회는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교회안에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며 또다른 예배나 신앙의 한 형태로, 하나의 제도나 법으로 뿌리 내리는 이상한 현상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그 오랜 신앙의 전통들과 우리에게 개혁신학과 신앙을 전수해 준 개혁된 교회들이 굳건히 지켜가던 그 전통들이 지금은 모두 폐기되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우리는 지금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있어서 모든 것이 더 엄격하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문제 관해서도,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 있어서도, 성도의 가정을 심방 하는 일이나, 교회에 정회원으로 등록을 하는 일이나 세례를 받고 교회에 입회를 하는 일에 있어도 교회에서 직분을 받게 되는 일도, 자녀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있어도 지금보다 더 엄격하고 철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권징과 치리가 살아있고 선명한 진리가 더 강력하게 더 긴 시간동안 강단에서 설교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 철저하게 지켜지고 세워지고 유지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그렇게 엄격하게 하나님을 신앙 하고자 했던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주께 받은 것,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바였기 때문이고 모든 성도들이 그렇다고 믿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엄격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보편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열렬하게 신앙하던 때로부터 벽 백년이 지나가고 한국교회만 해도 한 두 세대가 지나간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엄격하던 신앙의 틀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지금은 법도 원칙도 없이 모두가 제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형편과 상황에 따라서 교회에 가지 않고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여기도록 만드는 이상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잘 지켜가고 있는지 심도있게 매우 우려하는 마음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주께로부터 받은, 주가 제정하신 것을 다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지금 심각하게 변질되었고 변형되었기 떄문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열심과 의로 삼기 위해 만들어 낸 그릇된 것들도 분명히 과거의 관행과 관례 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개혁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반면 믿음의 선조들이 반드시 지킬 것을 결의했고 그것이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이기에 후대에 반드시 물려주고자 했던 위대한 유산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산들이 지금은 모두 구 시대의 유물처럼 폐기 처분되었습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린 결과 지금은 신앙의 명백한 기준, 지켜야 할 법과 원칙들 마저도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성경의 진리가 말씀하고 있고,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좁은 길을 걸어가며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그 신앙의 아름다운 전통과 유산들의 가치를 진지하게 지키고 있습니까..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그것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에 이토록 심각하게 흔들리고 방황하며 배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신앙의 불변의 기준과 지표가 되지 않고 사람의 생각과 정신이 그 자리를 대체했기에 이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 믿음과 그 구원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편의에 맞추어지고 우리의 생각에 편승되고 우리의 상황에 최적화되어 더욱 쉬워지고 더욱 부담이 없어지고 더욱 가벼워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결과 이토록 은혜 받기가 쉽지 않고 은혜로 충만하고 풍성한 신앙의 상태를 누리는 신자들의 수가 절대로 많지 않은 이러한 하향평준화의 모든 이유가, 주께로 부터 받은 그 위대한 신앙의 가치와 유산들을, 그 진리의 소중한 깨달음들과 그 지불해야 할 대가들을 모두 외면한 결과가 아닌지를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찬 사경회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