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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 토막 414 (히 13:10-16)

2023.10.16 08:17

hc 조회 수:2079

<묵상, 설교 한 토막>

 

영문 밖에서 불살라진 제물의 몸과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절묘하게 대조하면서 대속죄일에 죽은 희생제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사해졌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으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가 사해졌고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히브리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반복되는 속죄의 희생 제사로 결코 해결될 수 없었던 완전한 속죄가 성문 밖에서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 존귀하신 분께서 완전한 버려 짐을 당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역설적으로 모든 자들에게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의 박해를 받아 죽음에 이르러야 했을까요. 이것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지만 인간들의 편에서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간절히 기대하던 모습의 구주가 아니셨기에 주께서는 그렇게 인간들에게 처절한 버림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던 메시야는 어떤 모습입니까.. 강력한 정치적 능력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인들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을 가장 위대한 나라로 건설할 능력이 있는 그런 뛰어난 인물을 메시야로 그들은 바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모든 유대인들이 부정했던 그리스도는 그들이 꿈꾸던 그런 메시야가 아니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야가 아니었기에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거부되었던 것입니다.

 

회유와 박해 속에서 히브리 유대인들의 신앙은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로마의 박해에 굴복하여 배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이 히브리서의 말씀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 그들이 진정으로 굳게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논하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여러 가지 구약성경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증명해 왔습니다.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기를,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흘러 떠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계속 던지면서 거듭난 성도로서 어떻게 그 믿음과 마음을 굳게 지키며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그리스도 위에 견고하게 내려져 있지 않으면 참된 진리 위에 굳게 기초하지 않으면 우리도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을 기대하고 믿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하나님과 성경이 중심이 되지 않고, 신앙의 목적이 자기 부인에 맞추어져 있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생각과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집중될 때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들어 낸 하나님을 신앙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자 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메시야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의 신앙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 신앙을 좇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를 올바로 알고 깨닫는 일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것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실패자처럼 여겨지고 보여지는 모습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비참한 죽음으로 성문 밖에서 그 위대하신 생애를 마감하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메시야가 이 땅에서 받은 대우였습니다. 참 진리와 복음이 이 땅에 오셨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절대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고 다수가 수용할 수 없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갖는 특징입니다. 내 양만 내 음성을 듣는다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분의 공생애와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 자체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이해되어지고 충분히 수용되고 납득이 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자연인들에게는 결코 수용될 수 없는 것이 신앙이고 그 신앙을 가진 자들의 삶입니다.

 

주께서 왜 그러한 삶으로 그리고 죽으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완성하셨는지를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독교의 신앙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진리를 올바로 따라가면 갈수록 세상은 더욱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며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고 유일신관을 절대적으로 주장하며 인간의 권리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높이고 추앙한다면, 이 악하고 음란한 시대 속에서 순결과 거룩과 정직을 중요하게 여기며 희생과 사랑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고통과 질병과 실패 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 드리는 이러한 삶은 결코 세상이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냥 자기들처럼 살면 좋겠는데 신자들은 자기들과 같은 삶을 거부하면서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자신들과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기에 신자들이 싫은 것입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즐기며 살아가면 미움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들에게도 우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도, 그런데 그렇게 믿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서 믿으니 도무지 그런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시대의 정신을 따라 흘러가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고수하며 세상과 하나 되기를 거부하기에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평안의 시대에 그렇게 열렬하게 주를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다수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5 18~19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점점 더 세상과 분리될 수밖에 없고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의 이 부패하고 타락한 정신과 가치관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할 것이며 그것을 긍정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하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듯이 우리 또한 이 순수한 성경의 진리를 추종하고 교리가 말씀하는 그 가치에 순종하는 삶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결코 환영받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이 정직하게 주를 따를 때 우리 또한 그러한 취급을 세상에서 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위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뒤를 좇는 성도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