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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 토막 426 (갈 3:21-27)

2023.11.06 20:42

hc 조회 수:982

<묵상, 설교 한 토막>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가 이 자리까지 나아올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게 한 생애적인 감격과 믿음은 결코 우리의 삶의 방종을 허락치 않습니다. 율법을 경시하거나 율법을 거부하는 삶을 합리화하지 않도록 우리의 양심 가운데 역사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해 줍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이 진노 아래 있었던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때로 자만하거나 높아져서 우리 자신의 우리의 삶의 주인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만 열중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나의 어리석은 생각과 계획대로 방종하여 살아갈 때 율법은 우리를 멈추어 세우는 제동장치와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내 생각과 계획과 뜻 만으로 얼마든지 내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착각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립니다.

 

율법은 우리를 꾸짖습니다. ‘그대는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가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었오..’ 율법은 우리의 교만한 입을 틀어 막고 숨소리까지 죽이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율법의 이러한 강압은 우리를 언제나 영원한 피난처 이신 그리스도 앞으로 신속히 이끌어 갑니다.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하며 그 긍휼과 자비를 통해서 다시 일어설 새 힘을 얻게 합니다. 율법의 날카로운 검 앞에 깊이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십자가의 치료책을 갈망하게 되고 율법의 호령에 두려움과 절망을 느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안에서 참된 영혼의 안도와 위안과 새로운 소망과 각오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철저한 양심의 감옥처럼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통한 해방을 갈망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통한 이 은혜가 더욱 값지고 위대한 것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율법을 통한 우리의 영혼의 통제와 재갈이 올바로 작동될 때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는 더욱 충만하게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그 은혜를 더욱 바라고 소망하며 그 은혜에 붙들리도록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안전선 안에서 성도는 경건하고 절제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삶으로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신자의 삶을 이 땅에서 감당해 내고 그것을 위한 모든 대가를 지불할 믿음을 부어 주십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감옥 안에 가두고 또 그 감옥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열쇠도 줍니다. 이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백성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가 모두 은혜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그 언약을 깨뜨린 아담과 하와를 즉시 죽이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면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세우시고 모세를 준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며 그들의 그 길고 긴 원망과 불평을 감내하시면서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어리석고 참람한 요구에도 응하시고 결국은 그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시도록 섭리하십니다.

 

인간은 집요하게 하나님을 벗어나 각기 제 길로 가고자 하였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들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 오신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세상 같으면 계약을 어기고 약속을 파기하고 신의를 저버리고 나를 무시하면 어떻게 합니까.. 끝입니다. 고소 고발이 들어가고 영원히 그 관계를 단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그 모든 하나님을 향한 죄악들에 대해서 관용하시고 인내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살아왔던 그 죄악된 삶,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된 생애적인 감격을 얻었어도 은혜의 자리에서 미끄러져 또다시 자기를 사랑하고 물질을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려는 욕망에 노예가 되는 삶조차도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시고 용서하시며 돌이키게 하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요..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성경은 그것을 우리의 골수에 사무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러워지고 깨어지고 멀어져 버린 것을 결코 용인하거나 그러한 상태에 대해서 쉬 포기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사랑은 반드시 넘치는 은혜를 동반합니다. 그 은혜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베풀어지는 사랑의 속성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넘치는 사랑으로 기어이 달려가 품에 안으며 입을 맞추며 목욕을 시키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며 새 옷을 입히고 다시 가락지를 손에 끼워주는 과도한 낭비입니다.

 

부모를 떠나 죄악된 삶을 살다가 오래 감옥에 수감되었던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아들이 자신을 다시 자식으로 맞아 주고자 하신다면 동네 어귀 느티나무에 노란 리본 한 개를 매달아 주기를 바란다는 송구한 마음 가득한 아들의 편지에, 행여 눈에 보이지 않을까 모든 나뭇가지에 빼곡하게 바람에 물결치는 수백 개의 리본을 매달아 놓은 부모의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 없는 자들에게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는 그 과도한 사랑의 낭비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서, 우리를 향해, 바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끝이 없는 그 풍성하신 은혜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임한 그 위대한 선물의 결정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행위, 공로를 포함시켰습니다. 거룩한 말씀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밑으로 구겨 넣었습니다. 말씀의 권위에 다른 인간의 권위를 추가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다른 것들을 첨가하여 그것을 더럽혔습니다. 거듭난 성도의 행위와 삶을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보다는 복음이, 오직 은혜의 복음이 더욱 강력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마땅한 것이지만 은혜보다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면 결국 복음이 갖는 구원의 충분성을 훼손하게 되고 복음만으로는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더 힘을 갖게 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은혜의 복음도 율법도 설교 되어야 하지만 복음이 더욱 강력하게 선포되며 구원은 오직 죄인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임을 선포해야 하고 그 은혜가 더욱 강력하게 빛을 바라며 영혼에 각인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회초리에 강하게 매를 맞고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너지는, 율법이 주는 은혜 또한 반드시 영혼 가운데 경험되어야 합니다. 결국 율법의 감옥 속에서, 그 모진 고통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길이 전무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열쇠를 발견하게 되어 그 율법의 옥문을 열고 나오게 되는 그 복음의 찬란한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들에게,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