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설교 한토막>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의 확신이 때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가변적이며 희미해지고 회의와 의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멀어져 계속해서 거듭 죄 가운데 있거나 혹은 그로 인한 영적인 깊은 침체 가운데 있게 될 경우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성장해 나아가지 않고 무지와 나태함 속에서 그 영혼이 오랜시간 정체되어 있거나 뒤로 퇴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볕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영혼이 어두운 음지 가운데 마치 버려진 듯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버려진 듯한 차가움과 냉랭함 속에 그가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깊은 의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나같은 자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일까..’
‘나는 과연 구원 받은 신자인가..’
하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회의와 물음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영혼은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점점 더 확신과, 그 확신에서 나아가 영생에 대한 견고한 소망으로 두려움과 의심과 염려로 부터 자유한 상태로 성장해 나아가게 됩니다.
영적인 치열한 싸움을 기꺼이 감당하며 지금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의 그 이유와 원인을 하나님의 섭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깨달으며 믿음으로 그 모든 일들을 능히 감당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과 풍성한 은혜 안에서 영혼이 살아있고 깨어 있다면 어려움이 없겠지만 문제는 영혼이 그러한 상태에 있지 않고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전혀 제어하지 못함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있고 그로 인해서 강력한 죄책에 사로잡혀서 전혀 복음이 약속해 주고 있는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망각해 버리고 배회하며 방황하고 있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이 전혀 그 영혼의 어두움을 몰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구름 위에 여전히 태양이 빛나고 있어도 그 짙은 먹구름 아래서는 태양이 보이지 않듯이, 죄악으로 둘러 쌓이고 짓눌리게 되면 이 빛나는 진리의 약속을 보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가 신자의 영혼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놓여 있을 때 그의 영혼은 아무것도 확신하거나 소망할 수 없고 오직 깊은 죄책과 양심의 억압과 괴로움 아래서 신음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포자기의 상태 가운데 엎드려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상태에서 신자는 어떤 고뇌를 하게 될까요..
자기 같은 사람은 결코 성도라 불리울 자격이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도저히 이러한 상태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거나 성찬에 참여하는 일은 참으로 부끄럽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 스스로 결론 내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지금 심각하게 무너져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멀어졌고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깊은 괴로움과 자책의 마음도 결국 누가 그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가 택하심을 입은 신자가 아니라면 그토록 자신의 죄에 대해서 무기력하고 무능한 모습에 대해서 무슨 괴로움과 고통을, 절망과 가책을 느끼겠습니까..
그러면, 이와 같은 지경에 놓여 자신에 대한 비참한 마음을 느끼고 있는 자의 영혼의 상태라면 그는 과연 구원을 받은 자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교리 문답은 이어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그런 결핍에 대해서 매우 우려하여 그리스도 안에 발견되고 악에서 떠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교리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가 그런 자기의 영적인 결핍에 대해서, 한없는 자기 자신의 무력감에 대해서 매우 우려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여전히 놓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결코 부정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박약한 의지로는 도무지 현재 그렇게 행할 수 없지만 부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사 그 죄악에서 떠날 수 있기를 간절하고 진실되게 마음에 소원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이미 준비가 된 자로 간주하신다라고 교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심령, 죄에 대해 슬퍼하고 부끄러워 하는 마음, 그것은 신자의 표지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애통합니까..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이 죄의 문제를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처절하게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 24절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고 탄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어도 결코 당당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비록 연약하여 죄의 유혹에 넘어져 죄를 범할지 언정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주의 피를 헛되게 한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죄책이 복음이 주는 자유의 선언보다 그 영혼 가운데서 더 크고 강력하게 작용하기에 복음 앞으로, 십자가 앞으로 그 영원한 약속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은, 그럼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하심을 불신할 수 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8~9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사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죄악을 저지르고 반복되는 죄 때문에 괴로움과 가책과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그의 대속하신 보혈의 공로가 분명히 나에게 주어졌고, 내 자신은 이 진리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그래서 지금은 죄책감으로 인해 이렇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워도 부디 주의 은혜로 이 모든 죄악에서 속히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성령께서 그의 영혼 가운데 그 죄로부터 벗어나도록 그를 이끄시고 계심의 증거이기 때문에 교리는 이로서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준비된 자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요일 성찬 사경회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