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베드로에게는 악몽 같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베드로를 그렇게 처절한 실패의 장소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종을 보내셨고 여러 사람들의 바늘 같은 따가운 증언을 통해 그를 궁지로, 위기 속으로 내 모셨습니다. 마침내 베드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믿음이 부족한 존재인지를 벌거벗기셨습니다. 결코 숨겨지지 않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발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 그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발각되었을 때 왜 그곳을 피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는 계속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고가 혼란 속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넘어짐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모두 계획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 그 베드로의 교만함이 다시는 드러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겁에 질려 그의 입을 통해서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예수를 모른다고 말하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저주하여 맹세하며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 또한 결코 베드로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넘어져야 하는 자, 넘어져야만 합니다. 넘어짐의 그 비참함과 참담함을 겪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그 교만과 아집과 자기 사랑이 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만하는 자, 자기가 언제나 옳다고 여기고 겸손할 줄 모르는 자, 넘어지는 것이 답입니다. 결국 무너져 봐야 깨닫게 됩니다. 자신에게 깊이 실망하게 되고 그런 나를 결코 버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되어야 이제는 겸손히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그 사랑을, 십자가의 그 주님의 놀라우신 죄인을 향한 은혜를 높이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맹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바로 그 순간에 두 번째 닭 울음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오게 됩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통해서 회개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를 바라보시던 시선 때문이었고 이윽고 그의 마음에 선명하게 떠 오른 주님이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의 눈빛은 그로 하여금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닭 울음소리와 배반에 대한 경고를 주님께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들을 때 베드로의 마음은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내적인 감동과 깨닫게 하심이 없으면 진리를 들어도 반응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아둔하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베드로의 심령을 향해서 주님은 심히 안타까워하시는 그 애정 넘치시는 시선을 통해서 그에게 직접 주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곧 베드로가 자기 안에 있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신 주의 은혜였습니다.

 

주의 말씀이 기억나는 은혜가 우리의 인생의 가장 두렵고 힘겹고 슬프고 외로운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때,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의 말씀이 기억나자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닫지 못하던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베드를 바라보시던 그 따스한 시선 속에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부드러운 사랑과 연민이 넘치시는 그 시선은 결국 베드로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어 주님께서 그에게 하셨던 경고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어도 깨닫지 못하던 우리가 어느 날 우리의 마음속에 떠 오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지며 깨뜨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언제나 기도하시던 아버지, 어머니께서 내게 해 주시던 말씀이 불현듯 생각이 나서 우리의 자녀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득 떠오른 그 말씀이 우리를 돌이켜 회개의 자리로 이끄는 은혜가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 모든 자들에게 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일들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성령의 은혜가 진리를 통해서 역사할 때 우리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게 되고 우리의 식어 버린 마음에 다시 활활 불이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심히 통곡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깊은 찔림을 통한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한 마음, 이것이 바로 회개의 기본입니다. 눈물이 없는 참회는 거짓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찢어 놓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인가..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질 때 우리는 통한의 눈물을 쏟게 되어 있고 진실한 회개는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통곡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단지 두려움 속에서 도망을 치는 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통곡하며 회개함으로 회복의 길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치명적인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넘어지도록 허용하시지만 그 다음에는 반드시 그를 깨닫게 하시고 고치신 이후에 일어나게 하십니다.

 

회개의 시작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나를 바라보고 계심을 알게 되는 것에서부터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만큼 그 영혼이 굳어 있고 냉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자들이 바로 유기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돌이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 만이 불꽃같으신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합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뜰에 붙잡혀 얼굴은 사람들이 뱉은 침과 땀과 피로 얼룩져 있었을 것이고 온몸에 구타를 당하셔서 만신창이가 되어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과 잘 떠지지도 않는 깊이 멍든 눈으로 물끄러미 사랑하는 제자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이르지 않았더냐 베드로야..’ 주님은 안타깝지만 인자하신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쏘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그를 응시하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제자의 그 불쌍한 영혼을 회개의 자리로 이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돌아오도록 만드십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깊은 찔림과 애통함을 반드시 가져오게 되며 삶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단순한 죄책감과는 거리가 멉니다. 유다에게도 죄책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는커녕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불신자에게도 죄책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 다시 죄악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떠나게 됩니다. 여종, 그리고 사람들의 고소, 닭 울음소리, 그리고 주님의 안타까이 여기시던 그 시선.. 모든 것이 베드로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참소할 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는 당신에게 괴로움과 고통과 수치를 안겨 줄 자들을 보내십니다. 닭 울음소리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넘어지게 된 바로 그 순간, 가장 따스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잊을 길이 없는 교훈을 새겨 주십니다.

 

베드로의 자만,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여기는 의,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그리스도에서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타가 인정하는 수제자였음에도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한없이 가볍게 여기는 태도와 경고를 무시하는 안일함, 자신에 대한 과신,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는 게으름과 안일함, 경건의 훈련이 멈추어 있는 신자는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칼을 휘두르는 성급한 행동과 육신의 감정과 생각에 따른 급한 결정을 베드로는 내립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감정대로 그렇게 행동하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비굴함으로 주님을 멀러 따라갔습니다. 확신도 없이 우물쭈물하면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멀리 주님을 좇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렇게 무너지게 되어 있었고 패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는 일들을 겪게 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걸어가는 길을 가만히 지켜보면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될지 결국 실패와 패배를 쓰디쓴 고통을 겪게 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어떤 궤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넘어짐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그가 넘어진 것은 3년이나 주님의 뒤를 따라다니면 하늘의 교훈을 배우고 모든 이적과 기사를 보았던 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와 두려움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이기적인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평화의 시기가 아니라 환난이 닥칠 때 우리의 믿음보다 두려움과 염려가 더 크게 우리 안에서 작용하게 된다면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적과 기사를 보며 주님을 좇았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바짝 붙어서 그 모든 영광을 누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예수님의 곁에서 가오를 잡던 자들이었습니다. 벳세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할 때도 제자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의 시선을 더 느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둘러 제자들을 배를 태워 강 건너로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높임을 받으실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을 자신의 자랑스러운 스승으로 시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끌려가시게 될 때 베드로는 지금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고 그리스도와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맹세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직을 걸고, 아니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고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였고 그는 자신을 위해 준비한 돌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게 됩니다. 영광이 모두 떠나간 예수님의 초라한 시신을 그가 수습한 것입니다. 그도 두려웠습니다. 요한복음 19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며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휘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꺼리거나 감추거나 숨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도 분명히 두려웠지만 그는 그 두려움을 이기고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담대히 요구하여 그리스도의 장례를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이, 사명감이 두려움을 압도하고 그 일을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셉의 행동의 차이를 깊이 사유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무너진 그 자리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나게 하시고 그 앞에 오열하며 마음을 찢어 회개하도록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돌아와야 합니다. 지체하지 말고 주님의 품으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실패를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교훈하시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실패와 절망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실망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우고 난 뒤에 우리는 다시 일어서는 자들입니다. 이제는 주 안에서 주님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더욱 주 안에서 든든히 서 가게 될 것입니다. 하여 어떤 핍박과 박해가 우리에게 닥치게 되더라도 우리를 언제나 일으켜 세우시던 그 전능자의 팔을 의지하며 우리는 마지막 큰 시련과 고난도 능히 이겨내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는 무너졌지만 베드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무너짐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 갈릴리 바닷가에서 생선을 굽고 조반을 준비하여 그를 맞이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그 감격적인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눈물겨운 주님의 넘치는 사랑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주님은 이러한 말로 그를 일으켜 세우시며 사명을 당부하심으로 베드로를 향한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다시 일어선 베드로, 그는 성령을 받은 이후에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하루에 3천 명을 회심시키는 사도로 쓰임을 받습니다. 그가 돌아오게 한 영혼은 수천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도 쓰러지고 무너지는 나약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불량품 같은 인생이지만 그런 인생들을 정성을 다해 깨뜨리고 다듬으셔서 유능하고 능력있게 사용해 나아가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당신을 붙들고 계십니다. 다시 일어선 이후에 우리도 베드로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다가 주님께로 돌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에서 말입니다. 오늘도 이 진리를 기억하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성실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날들이 우리에게 찾아오더라도 능히 감당할 믿음 주시고 우리가 넘어지게 될 때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며 더욱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다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주일 설교 리뷰 471 (마가복음 14장 66~72절) hc 2025.12.19 35
2096 주일 설교 리뷰 470 (마가복음 14장 66~72절) hc 2025.12.18 50
2095 주일 설교 리뷰 469 (마가복음 14장 66~72절) hc 2025.12.17 64
2094 주일 설교 리뷰 468 (마가복음 14장 66~72절) hc 2025.12.16 64
2093 주일 설교 리뷰 467 (마가복음 14장 66~72절) hc 2025.12.15 62
2092 주일 설교 리뷰 466 (마가복음 14장 53~65절) hc 2025.12.12 69
2091 주일 설교 리뷰 465 (마가복음 14장 53~65절) hc 2025.12.11 88
2090 주일 설교 리뷰 464 (마가복음 14장 53~65절) hc 2025.12.10 89
2089 주일 설교 리뷰 463 (마가복음 14장 53~65절) hc 2025.12.09 108
2088 주일 설교 리뷰 462 (마가복음 14장 53~65절) hc 2025.12.08 106
2087 주일 설교 리뷰 461 (마가복음 14장 43~52절) hc 2025.12.06 100
2086 주일 설교 리뷰 460 (마가복음 14장 43~52절) hc 2025.12.05 161
2085 주일 설교 리뷰 459 (마가복음 14장 43~52절) hc 2025.12.03 116
2084 주일 설교 리뷰 458 (마가복음 14장 43~52절) hc 2025.12.02 122
2083 주일 설교 리뷰 457 (마가복음 14장 43~52절) hc 2025.12.01 139
2082 주일 설교 리뷰 456 (마가복음 14장 32~42절) hc 2025.11.28 155
2081 주일 설교 리뷰 455 (마가복음 14장 32~42절) hc 2025.11.27 234
2080 주일 설교 리뷰 454 (마가복음 14장 32~42절) hc 2025.11.26 176
2079 주일 설교 리뷰 453 (마가복음 14장 32~42절) hc 2025.11.25 145
2078 주일 설교 리뷰 452 (마가복음 14장 32~42절) hc 2025.11.24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