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9 07:57
주께서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에게 금세와 내세에서 받을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잃어버린 모든 것을 금세에 백 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보상은 물질적인 복과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서는 ‘핍박을 겸하여 받고’라는 말씀에서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내세에서 백 배의 풍요에 대한 약속은 우리의 가족 관계가 더욱 확대되고 깊어진다는 의미로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그리스도의 피로 연합된 가족과 같은 지체들을 얻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자매들, 형제들 어머니들과 자식들 모두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많은 믿음의 가족들을 내세에서 얻게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며 이 모든 믿음의 지체들과 더불어 공동체는 핍박을 겸하여 받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궁극의 복은 바로 내세에서의 영생의 복이 되는 것이며 이 복을 받지 못할 자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핍박과 박해 속에서 신앙의 공동체는 더욱 강력한 사랑으로 결속되며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가 박해 속에서 뚜렷하게 내세를 소망하게 되고 확신하게 되면서 더 하나가 되어 영생을 열망하게 된다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반드시 7년의 대환난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마지막 때에 모두 함께 그 환난 속으로 들어가게 될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태우는 환난과 핍박의 불꽃이 우리의 신앙의 진위를 가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동체는 더욱 성경이 말씀하는 그 공동체의 모습으로 발전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가치들 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더욱 풍성한 새로운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우리는 다가오는 핍박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지체들은 죽음까지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에서 만난 성도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얻게 된 풍성한 선물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이 더욱 뜨거워지고 더 깊어지기를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탄 마귀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일들을 보십시오. 성경이 우리의 존재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판단하고 비방한다면 우리는 이 진리의 가르침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심으로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며 핍박과 박해까지도 함께 감당하고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줄 수 있는 지체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구원과 영생의 확정은 인간의 평가, 인간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사람의 노력과 기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가장 먼저 좇았다고 큰소리치는 베드로의 말을 의식하셔서 주님은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일등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더욱 구체화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20장 1~16절은 포도원의 일하는 품꾼의 비유가 삽입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시, 6시, 9시, 11시에 나가서 품꾼을 불러 일을 시켰지만 날이 저물었을 때 모두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임금을 지불한 비유를 통해서 이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당연히 구원이 자기들에게 가장 먼저 임한다고 믿었던 유대인들은 가장 나중에 구원의 수에 차게 되고 오히려 그들이 멸시했던 이방의 모든 민족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지게 됨으로 그들이 먼저 구원의 수에 차게 됨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모든 규례들을 잘 지킨 것으로 아무리 자신들의 의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들은 도리어 천국에 들어갈 수조차도 없게 될 것이고 심령이 가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씻던 창녀와 세리 같은 자들이 그들에게 임한 은혜로 말미암아 그 겸비함으로 그들이 먼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고 영생이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매우 모욕적인 말씀입니다.
개혁주의 정통 신앙을 추구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지식이 결코 교만의 이유가, 우리 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두려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의외의 결과가, 반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기준으로도 우리 스스로 만족하거나 우월의식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생각과 태도와 마음은 구원에 있어 극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천국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높아져서는 안 되고 나를 드러내려 해서는 안 되며 어린아이 같은 순전하고 순종적이며 절대 의존적인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과 영생 얻는 믿음이라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출입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복음은 결코 그렇게 쉬운 구원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하신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여러분은 분명한 지식을 가지셔야 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믿었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었던 유대인들, 유대주의를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안에 유대주의와 다르지 않는 신앙의 모습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경계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구원에 대한 이같이 분명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과 교리와 신학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