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2 08:21
주님은 두 번째로 나사렛에 방문하셔서 첫 번째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을 권세 있게 선포하신 주님에 대해서 나사렛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놀라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긍정적인 놀람과 부정적인 놀람 두 가지의 경우에 다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부정적인 놀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 놀람은 ‘당신 같은 천한 출신의 신분인 자가 어떻게 이런 탁월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는 의미의 부정적인 놀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 권능이 어찌 됨이뇨..’ 이 구문에서 ‘이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거듭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 지시 대명사의 반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경멸하고 얕잡아 보는 말투입니다. 당신 같은 자가 어떻게 이러한 비범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지 매우 경멸하고 의심하는 투의 말들을 던지며 예수께서 가지신 그 지혜와 권능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그들은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너 같은 주제에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주워듣고 어떤 재주를 얻어서 우리를 지금 기만하려 하는 있는 것이냐.. 그들은 이러한 경멸적인 태도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회당에서 전하시는 주님의 말씀의 그 탁월함에, 그 지혜와 권능에 거듭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그들 중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매우 놀랐지만 그들이 아는 예수에게서 그런 능력과 권세와 지혜가 나타날 리가 없었기에 그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며 이를 매우 업신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합니다. 그들 눈앞에 아무리 진실이 있어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드러내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불신자, 불택자들의 특징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의 결과물이 결코 아닙니다. 믿어지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예수를 구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아무리 많은 증거들을 자연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더라도 결코 예수를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믿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과 65절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6, 27절에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두를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들에게 임하고 믿어지고 감격하게 되고 한없이 감사하게 되는 그 마음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시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친히 들었어도 말도 되지 않는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어리석은 생각과 고집에 사로잡혀 예수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이 나사렛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믿음은 이성적 추론의 결과로서 획득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그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일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