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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설교 한토막296 (히 9:1-10)

2023.04.25 07:08

hi 조회 수:1705

<묵상, 설교 한토막>


성막의 그 기능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 원형의 비유일 뿐이라고 히브리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 제도와 제사장을 통해서 드리는 예물과 제사를 통해서는 결코 그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속죄의 제사는 외형적인 속죄만 이루는 것이지 그의 마음과 양심까지 죄의 오염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속죄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는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 사이에서 전인적인 관계의 회복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밝히고 싶어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개종하기 전에 하나님께 드린 모든 외형적인 제사는 결코 양심까지, 그들의 영혼까지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감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러한 논증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의미는 이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제사장은 매일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지성소 안으로 직접 나아가는 일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허락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때 정녕 모든 인간들이 죽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 너머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고 있었고 그 곳은 누가 들어가거나 들여다 볼 수 없는 지엄한 곳으로 휘장에 의해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는 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길을 막아 버렸고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으로만 제한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때가 이르러 늘 불순종하며 율법을 지켜 행할 능력이 전무한 인간들에게 휘장 넘어 그 지존하신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직접 예배할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이 새롭게 열려졌다는 상징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며 갈보리 언덕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게 된 이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죄인들이 이제 짐승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보혈이 지성소에 뿌려짐을 통해서, 영원한 속죄가 단번에 이루어진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서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로 그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위대한 특권을 얻게 된 사실을 히브리서는 이 성막의 비유를 통해서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언약의 불완전성과 그 한계를 뛰어 넘은,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는 위대한 새 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해 임했음을 히브리서가 논증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중생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진정으로 그 마음과 양심까지 속죄 받은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될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하늘의 장막에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자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시며 성령과 더불어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그 길을 활짝 열어 주시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앞에 나 있는 보배로운 길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스도께서 닦아 놓으신 위대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히브리서는 장엄하게 이 진리를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진리를 굳게 믿고 의지하며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마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은혜는 이방인인 우리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시고 성령의 믿어지게 하시는 약속을 하나님의 모든 택하신 백성들 안에서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갈라디아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택자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은혜로 인해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은 구원이 나에게 임하게 됨을 믿고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 되심을 믿고 고백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은혜의 방편을 소중하게 붙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이것을 분명히 약속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내용이 그리고 우리의 모든 믿음이 관념적이고 단지 종교적인 의식만을 지키는 외식과 메마른 형식에 그칠 뿐이라면 그는 지금 여전히 소멸된 외형적인 죽은 의식으로 하나님께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그 양심이 정화되지 않은 형식적인 종교인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