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설교 한토막>
히브리서는 끊임없이 유대주의로의 회귀를 강요 받고 있었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언약 아래에서의 성막과 제사장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하늘 장막에서의 대제사장직의 사역으로 대체하며 모든 구약의 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까지만 국한 된 것일 뿐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서 여전히 많은 부분이 구약적인 지식과 전통에 묶여 있음을 봅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공로, 노력을 신앙의 더 중요한 요소로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도 우리의 의와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물질을 바쳐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봉사해야 하고 전도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직도교회 안에서 지배적입니다.
여전히 구약에서 족장들이 받은 모든 축복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려 하고 무엇을 지키고 지키지 않고의 문제에 지나치게 국한 된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경도되어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새 언약의 본체와 원형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 참된 자유함과 평강의 그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사함의 은총의 그 기쁨을 여러분은 맛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삶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메마른 전통주의, 지식주의 속에 고착되어서 정작 십자가를 통한 대속과 구원의 감격도, 그 기쁨도 맛보지 못한 채 그저 형식적인, 혹은 율법적인 종교생활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경은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저명한 설교자는 성소와 지성소를 신앙의 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는 성막 내주의 두 방은 하나님과의 가까움의 등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성소의 삶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성소에서의 삶은 그보다 못한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해서 이러한 단계설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단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함으로서 새 언약의 탁월성과 우월성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이 더 높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수준이 있고 그보다 한참 미치지 못하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가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아직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참 신자가 아닐 뿐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와 감격을 경험했어도 여전히 믿음이 깊지 않은 사람이나 신앙의 지식이 깊지 않아 때때로 흔들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의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에 의한 은혜의 올바른 방편을 통해서 갓난 아이가 무럭 무럭 자라가듯이 진리의 꼴을 먹으며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경우입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고 신앙이 성장하기 위한 정확한 진단을 통해서 신앙의 바른 길로 행하기 위한 교정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시대 속에서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강화 시킬 목적으로 이 진리를 그들에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리스도만을 붙들어야 하는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구체적을 무엇인지를 성막의 제도와 제사장의 직무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옛 언약에서 이제 새 언약으로 나아기지 못하게 되는 경우 그것은 신앙이 연약하거나 보다 열등한 구원의 수준과 단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 믿음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이요 결국 흘러 떠내려 가게 되는 배도의 위험성이 있는 지극히 위험한 영혼의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믿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을 단지 종교적인 취미생활처럼 여기거나 혹은 신앙의 어떤 막연한 의무감을 가지고 예배에 나아오고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관성에 의한 것일 뿐인 그런 신앙의 모습이라면 그런 사람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는 아직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움직이시며 복음의 빛을 비추어 날마다 우리의 무지를 퇴치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이신 교회와 지체들을 위한 헌신과 섬김에 우리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지 못하고 있다면,
날마다 죄를 참회하고 내세를 소망하며 오늘의 모든 고난과 괴로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진리 안에서 무한한 은혜와 기쁨과 위로를 얻는 삶을 지금 그대가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구원에 이른 하나님의 자녀라 볼 수 없습니다.
언제든 사람의 생각과 판단과 결정을 따라 진리를 버리고 배도할 수 있고 믿음의 자리를 떠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 그의 양심이 자유롭게 된 자라야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 엄마의 손에 이끌려 동물원에 가서 진짜 사자를 보기 전까지는 사자의 모습을 그림과 사진으로만 보면서 막연하게 머리속으로만 상상하게 되듯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런 막연한 느낌만으로 생각하고 상상하게 될 뿐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신앙은 결코 견고하게 뿌리내릴 수 없고 수없이 의심과 회의에 사로잡히게 되고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숱한 방황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시간들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막연함이 확실함으로 분명함으로 경험되고 믿어지고 그래서 그 믿음의 대상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으며 나를 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점점 더 발전해 나아가야 그가 참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아갈 수 있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도입니다.
명목상의 이름 뿐인 신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성령이 열어놓으신 그 길을 따라 십자가를 경험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삶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나에게 주어진 이 좁은 길을 끝까지 올바로 행할 수 있도록 매일 매일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능력을 구하는, 그 복된 자녀의 특권을 맛보고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구약의 모든 옛 언약과 그리고 성막의 모든 불완전한 제사의식들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라고 여겼던 그 신앙은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믿어지게 하시는 그 순간이 오기 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아들을 구주로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휘장 너머 하나님 앞으로,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아들을 통해서 열어놓으신 그 길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제는 성도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고 사랑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모든 은총을 경험하고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되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그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당신의 아버지가 되심을 잊지 마십시오.
이 복된 은혜가 갈보리 언덕 위에서 자신을 버리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하신 선물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하나님께 당신의 모든 것을 아뢰십시오.
슬퍼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마시고 고개를 들어 이 약속을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그분의 딸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