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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섬기는 자’, ‘디아코노스는 종, 봉사자, 일꾼을 가리킵니다. ‘종’ 이라는 뜻의 디아코노스와 비슷한 의미의 둘로스라는 단어가 주종 관계 속에서 강제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종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디아코노스는 자발적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일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의 모습은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 하신 것입니다. 종이기 때문에 종으로 섬기는 것과 종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종과 같이 되어 섬기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빌립보서 2 5~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정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품게 된다면 가정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 어떤 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 모두를 위해 내 자신이 자발적으로 희생하고 섬기려 하고 공동체 전체를 위해 스스로 어떻게 교회를 섬길지를 언제나 생각하며 그 일을 묵묵히 해 나아가는 자, 그가 진정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됨을 진리는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교회안에 가장 높은 자로 인정되는 성도는 오늘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주를 담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성되게 교회와 지체들을 섬기는 분들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순간, 내가 높임을 받는 순간, 사람들이 나를 알아줄 때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것이 모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까지 하셨습니다.언제나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을 것을 교훈 하셨고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강조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점입니다. 세상에서는 네가 최고가 되라고 말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하고 네가 하고 싶은데로 네 자신이 주인이 되어 네 마음대로 인생을 즐기며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너를 낮추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공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오직 예수 때문에 오직 주를 닮기 위해 우리 또한 그같은 삶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가 어떻게 믿음이 깊은 자를 섬길 수 있습니까.. 믿음의 분량은 그의 섬김의 모습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섬김의 대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섬김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은 강조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실물 교훈으로 어린아이를 자신에게로 데리고 오셔서 그들 앞에 그 어린아이를 안으시며 세우셨습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한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주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요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린아이는 사회적 지위나 법적인 권리가 전혀 없는,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계수할 때도 그 수에서 어린아이들은 제외되었을 만큼 그 존재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이 한 아이를 안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아이를 이렇게 자상하게 안아주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어린 한 영혼도 지극히 소중히 여기심을 보여주시며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에서부터 나그네를 대접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을 명하셨습니다. 은혜를 되갚아 줄 아무런 힘도 재물도 없는 자들을 환대하고 영접하고 섬기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척도로까지 간주하셨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내 이름으로그렇게 하는 행위를 주님은 주목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밀사나 대사를 영접할 때는 그를 보낸 왕이나 중요한 대상에게 하듯 영접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주께 하듯이 영접하고 환대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우리가 섬겨야 할 모든 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함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주께 하듯, 어린아이같이 힘없는 자를 아무런 대가 없이 영접한 그것을 곧 주께 한 것으로 여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어린아이 하나를 대가 없이 영접하고 그를 사랑으로 섬길 때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그렇게 한 것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유대주의 종교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배운 제자들에게 그 추악한 옷을 벗기시고 겸손의 옷을 입을 것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진정한 섬김과 사랑의 수고는 받을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원해서 기꺼이 그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은 내가 이미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주께로부터 받았음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나 같은 죄인에게 임한 형언할 길이 없는 사랑과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자라야 아무것도 기대함 없이 베풂의 의미를 알고 주님처럼 그렇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디 이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무엇인가 선한 일을 행하고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으로 서운하고 섭섭하고 화가 난다면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의지로 당신의 의로 당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는 섬김이 아닙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나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에 대한 그 감동과 감사에서 자연스럽게 섬김이 나오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모든 섬김의 원동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경험하는 일들이 반드시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합니다. 주님만이 모든 섬김의 능력의 원천이 되심을 잊지 마십시오. 섬긴 후에도 나 자신에게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어야 그것이 진정한 섬김이 됨을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이 세상에서든 천국에서든 주님을 섬긴 그 대가를 그 결과를 기대하며 주님을 조건적으로 좇는 것이 아니라 주를 메시야로 믿고 고백하며 그렇게 주님의 뒤를 함께 좇아갈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 됨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으뜸이 되기 원하고 특권을 누리기를 원하여 서로 이 문제로 다투기까지 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 진리를 교훈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진리의 도를, 복음의 그 진실된 의미를 모두 금방 깨닫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기복주의로 갔다고 신비주의로 갔다가 은사주의로, 번영신학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복음으로,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가 택자라면 주께서는 여러분의 발걸음을 영혼을 그렇게 인도하셨듯이 참된 복음을 깨닫는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믿음이 제자리를 잡기까지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온갖 다른 가치를 좇아다닐 수 있습니다. 현세 기복과 야망과 성공과 행복의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주의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 그릇된 가치를 배우고 그것을 앙망했습니다. 그 잔재들이 남아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영광에만 심취했던 모습을 보십시오.

 

처음 다니게 된 교회에서 배운 대로 그것이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신앙의 틀을 오랫동안 우리는 고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것을 보고 그것을 통해서 바른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유난히 한국교회와 성도는 타인보다 높아지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기복적 요소가 그토록 크게 자리 잡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던 시기가 이 나라가 제일 못살고 무지하며 모든 것이 낙후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배움이 깊지 않았던 시대에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은 그래서 깊이 왜곡되고 그릇되게 이해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현세 기복주의나 신비주의에 매달려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태동되었습니다. 신앙에 있어 지성적인 부분이 상당히 결여된 채로 교회의 기초가 부실하게 놓여졌기 때문에 여전히 한국교회의 신앙의 상당 부분은 이 현세기복주의나 신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어린아이의 비유를 통해서 더욱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으뜸이 되는 것이 아님을 거듭 교훈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정 반대의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높아지려 하면, 권력에 심취하면 가정도 교회도 결국 깨어지고 무너지게 됩니다. 내가 더 높아지려 하면 더 대우받으려 하면 분열과 갈등으로 가득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알아 달라고 아우성치면 가정이든 교회든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결국 모든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자기를 무시한다고 느끼기에 모두를 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 마음을 주께서 치유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독 신앙은 이 세상에서 성공을 좇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이러한 모습들을 보고 자랐고 배웠고 부러워하며 하나님을 신앙하는 어리석은 틀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언제나 세상에서 으뜸이 될 생각만으로 가득한, 그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동기와 목적이 되어 왔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던 기억, 풍족하게 사랑을 받고 누리지 못했던 결핍과 항상 억압되고 짓눌린 상처와 기억들은 기필코 내가 최고가 되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나를 알아 달라는 심리로 깊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깨뜨려져야 할 죄악의 잔상들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동기에서 비롯된 나를 위한 모든 섬김은 결코 주님과는 무관한 것이 될 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으면 하늘에서 아무것도 받을 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으면서 주님을 섬겨온 그 모든 날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것으로 모두 인정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도와 달라고 말하는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의 모습으로, 가족의 모습으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렇게 하셔도 받아들이고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주님께 하듯 우리의 가까운 이들을 섬기고 계십니까..

 

오직 예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모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용납해야 합니다. 주께서 이 허물 많은 죄인들을 그 넒은 사랑의 가슴안에 모두 담으셨듯이 우리 안에 그들을 모두 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 마음을 주시기를 우리는 주께 기도해야 합니다. 으뜸이 되려 하지 말고 이 땅에서 모든 대가를, 보상을, 나를 알아줌을 바라지 마시고 주님처럼 섬기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십시오. 그로 인한 진정한 기쁨을 맛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를 믿어 모든 좋은 보상을 이 땅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이 땅에서 그토록 모든 것을 다해 우리를 섬겨 주셨듯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갈 본향을 그리워하며 주와 함께 누리게 될 마지막 날의 그 빛나는 궁극의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오늘도 소소하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섬김이 필요한 모든 자들에게, 우리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희락을 맛보며 이 세상을 그렇게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알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더 풍성한 은혜와 사랑의 마음을 부어 주시길 다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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