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4 08:00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곤경에 빠뜨려 그들을 몰아가던 서기관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그러자 서기관들의 대답 대신 무리 중에 있던 한 사람이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말을 하지 못하는 귀신들린 아들을 두고 있었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일어난 일에 대해서 소상히 예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께로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주님께서 계시지 않자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부탁을 한 사실을 말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어떤 상태 가운데 있는지에 대해서 주님께 고하게 됩니다.
귀신이 어디서든 그를 붙잡아 거꾸러뜨리면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가면서 그 육체가 파리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고 소상히 주님께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설명으로 보아 아이의 증세는 간질병으로 보여지고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이 귀신의 역사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 병을 간질병이라고 기술했습니다. 그 증상이 간질병이 발작했을 때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이 아이를 고쳐 줄 것을 말했음에도 그들은 자신의 아이를 고칠 수 없었다고 예수님께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지금과 달리 귀신이 들려서 그것이 질병으로 발작하게 된 경우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강력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죄 아래, 사탄의 권세 아래 매여 있는 인간의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위함 이었고 더 나아가 이러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 가운데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사탄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오늘날도 모든 질병에 대해서 축귀를 하는 행태들은 참으로 코미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이시지만 주께서 이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의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관해서 유심히 들어 주는 것에서부터 치유의 시작이었고 주께서 이 문제에 개입하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그를 안심시키는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심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고 그 자녀가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질병의 고통이 몰려와 괴로워하는 모습을 늘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모로서의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낫지 자식이 그 지경이 된 모습을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은 그야말로 갈갈이 찢기어지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왔으나 주께서는 계시지 않고 그들의 제자들에게라도 간청을 해 보았지만 제자들 중에 누구도 이 아이를 고쳐주는 이가 없었으니 그 아비에게 절망감과 실망의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러나 이미 귀신들을 쫓아낸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13절에 파송을 받았던 제자들의 활동에 대해서 성경이 기록하기를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칠 능력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아무런 능력을 행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제자들도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이유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완전히 바닥이 나 버린, 고갈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비롯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메시야에 대해서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 이같이 탄식하셨습니다. 수없이 능력을 행하고 기적과 이사를 행했어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어 언제나 의심하고 또 넘어지고 무너지는 예수님 당시의 모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이같이 탄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 이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같은 능력을 행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지금은 다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 곁에 계시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귀신들린 아이를 제자들이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까지 몰려와서 그들에게 시비까지 걸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이 같은 일에 직면하자 제자들은 위축되었고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쳤어야 했지만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가운데 맞닥뜨린 그 상황에서 그들의 믿음은 심히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끌어내야 하는 극한 상황에 이를 때 믿음이 없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초라한 제자들 모습처럼 이러한 일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돌파해 나아가야 할 그 순간에,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오래 교회를 다녔고 말씀을 들었으니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을 압도하는 어떤 크고 두려운 문제 앞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의 부인할 수 없는 믿음의 현주소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만 함께 계시지 않으면 언제나 두려워하고 무능력하며 우왕좌왕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만큼의 담대한 믿음이 그들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이처럼 가변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번 가득 채워 놓으면 결코 줄어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분량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수시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 담대하고 강했던 믿음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 믿음에서 현저히 뒤로 물러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때는 출중했어도 그 믿음이 어느 순간엔가 모두 다 소진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