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0 08:11
주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십계명 가운데 인간에 대한 명령들을 열거하시면서 이것을 알고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단순히 알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힘써 지켰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이 청년이 어떤 대답을 할지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던지신 것은 그다음에 그에게 또 다른 허를 찌르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의 부자 관원이었던 이 청년은 자신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십계명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그렇게 말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것 만을 지켰을 뿐입니다. 계명을 지킴으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의로운 자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그는 열심히 계명과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의를 드러낼 수 있는 율법에 대해서 유대주의자들은 이것들을 열심히 지킴으로서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고 의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결코 의롭고 선한 분이 없음을 인간들에게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해 인간들이 절대로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스스로 선하고 의로워지려 했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와 청교도 정신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하며 교회를 세우고 성도의 회심과 구원과 성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은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올바로 성경을 따라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이러한 정통 신앙의 규범과 규례에 대해서, 역사적 개혁교회의 여러 전통과 교리와 대한 분명한 지식이 또 다른 우리의 의가 되고 교만의 빙거가 되어 그릇된 우월주의에 빠진 채 지체들과 교회와 목회자들을 비판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심각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지식이나 선행, 봉사나 그 밖의 우리가 자랑할 어떤 의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치장하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의 의와 올바름을 과시하며 지체들을 정죄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또 다른 모순과 오류와 죄악에 빠지게 만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 올바로 지키는 것이, 무엇을 더 올바로 행하는 것이, 무엇을 더 정확하게 아는 것이 또 다른 우리의 의가, 교만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또 다른 이름의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기만하는 율법주의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삶으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 여전히.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보다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견고히 지키고 있는 가치보다는 아직 깨닫지 못하여 지키지 못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은 내가 임의로 취사선택해서 그것만이라도 지키면 율법을 모두 지킨 것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율법 전체를 완전하게 모두 지켜야만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율법을 모두 지킴으로 의롭게 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율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의 전적인 무능과 전적인 타락을 깨닫게 하는 수단일 뿐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라디아서 2장 16절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분명하게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 율법의 그 기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신앙을 보십시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지만 철저한 인본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인본주의에 물든 기독교 신앙은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 인간에 대한 박애와 평등, 이러한 가치들로 미화되어 결국 인간에게 잘하고 인간이 행복하게 차별 없이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마치 이것이 복음의 가치이며 당위처럼 그렇게 둔갑시킨 채로 여전히 그릇된 신앙의 길로 영혼들을 미끄러지게 하고 있습니다.
주일의 예배는 온전히 드리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는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많은 책을 통해서 깊이 있는 신앙의 지식은 탐독하면서 지체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실천하지 않는 불균형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해박하면서 성도로서의 의무는 전혀 실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모순되며 불완전합니다. 어떤 것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있어도 자신이 선호하는 어떤 부분은 열심을 내고 어떤 부분은 전혀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며 연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자들이고 그러하기에 누구도 정죄하거나 비판하거나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연약함이, 여전히 고집스러움과 여전히 순종되지 않는 영역들이 존재합니다. 그러하기에 성도는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